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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01. 2017

보이는 차별이 아닌 안 보이는 장벽을 깨는 영화

<히든 피겨스>(2016), 테오도르 멜피

겉으로만 드러나는 차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장벽에 대한 영화. 일상에서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는 있지만 세 주인공은 각각 서로 다른 장벽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대처한다. '캐서린'(타라지 P. 헨슨)은 새로 배치된 부서 내에서의 냉랭한 대우를 감내해야 하고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는 승진이 번번이 가로막힌다. '메리'(자넬 모네)는 이루고 싶은 꿈이 좌절될 위기에 처한다. '캐서린'은 타협하지 않고 실력으로 목소리를 냈으며, '도로시'는 세상의 변화를 직감하고 미리 준비했고, '메리'는 셋 중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주어진 틀 안에서 꿈을 꺾지 않는다.



당시 우주임무국의 여러 요인들을 참고한 가공의 인물인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을 비롯해 유색 인종의 화장실 사용 문제 등 실제와 달리 영화적 각색이 이루어진 부분들이 존재하나, <히든 피겨스>는 소재에 대한 얄팍한 접근과 편의적 전개를 최소화한다. 제목처럼 숨은 이면의 것들에 대한 시선을 유지하는데, 무엇보다도 영화의 성취는 '캐서린'과 '도로시'와 '메리'가 모두 '머큐리 계획'의 핵심 인물이 아니라 계획의 실현을 가능하게 한 조연에 가깝다는 데 있다. 캐스팅 역시 인지도 높은 스타 배우지만 조연 위주의 배역을 맡아왔던 이들이 그녀들을 주연으로 소화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케빈 코스트너 같은 배우가 보조적 인물을 소화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에게 악감정은 없어요."
"알아요, 본인이 그렇다고 생각하시겠죠."


극 중 '짐 존슨'(마허샬라 알리)이 '캐서린'에게 첫만남에서 범하는 말실수와 같이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상대에 대한 차별적 언행을 흘릴 때가 더러 있다. 이는 온전한 역지사지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된다. <히든 피겨스>를 단순히 인종 차별을 딛고 일어서는 성공 스토리 정도로만 정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야간 대학을 다니는 것부터 동네의 도서관에 출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여성들은 기본적인 것들에서부터 숱한 권리 침해를 당해왔는데, 이들이 숨은 공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타고났거나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몇 갑절의 노력과 인내와 끈기가 동반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정해진 규정을 따르는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결승선부터가 달라져 있는 일. '캐서린'과 '도로시'와 '메리'의 성취는 그 결승선을 넘어 '최초'가 되는 것 그 자체였다. 언어적 장치와 비언어적 장치가 조화된 영화의 장점은 그 특별하고 비범할 수밖에 없는 일을 일상적이고 사소한 컷들에 다수 녹여냈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알'이 '캐서린'에게 분필을 건네는 대목(실력에 대한 신뢰), '미첼'(커스틴 던스트)이 '도로시'를 늘 '도로시'로만 부르다가 처음 '미스 본'이라 부르는 대목(상대에 대한 인정)과 같이 말이다. 세상의 변화는 사소하지만 바로 그런 일들에서 시작된다. '나'와 '타인' 모두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는 문장은 국내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문구이지만, 영화의 내용과도 비교적 정확하게 맞아들어간다. 바로 이런 카피를 쓰는 게 내 일임을 엔딩 크레딧을 보는 동안 상기했다. 퍼렐 윌리엄스와 한스 짐머가 완성한 영화음악도 돋보인다. <히든 피겨스>는 순 제작비의 10배에 달하는 극장 수익을 전 세계에서 기록하고 있다. 쉽고 명쾌한 대중영화 속에서도 이런 통찰을 담아낼 수 있는 힘은 결국 콘텐츠 자체에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 8/10점.)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6)>, 테오도르 멜피

2017년 3월 23일 (국내) 개봉, 127분, 12세 관람가.


출연: 타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자넬 모네, 케빈 코스트너, 커스틴 던스트, 짐 파슨스, 마허샬라 알리, 글렌 포웰 등.


수입/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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