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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23. 2017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 그러나 시대를 관통하는 영화

<박열>(2017), 이준익

<박열>을 보면서 소재의 한계는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동주>의 윤동주 시인에 비해 인지도가 약하고 박열에 비해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이 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대를 보고 읽는 의식만 있다면, 역사 앞에 꼭 엄숙하고 뜨거워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법정 시퀀스의 한 컷.


<박열>을 통해 굴복하지 않는 삶의 에너지를 본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알면서 일말의 망설임 없이 뛰어들고 또 동참하는 두 사람을 보며 '후미코'(최희서)의 "그와 함께한 시간만이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었다"는 독백을 떠올린다. 그것은 삶의 부정이 아니다. "나는 잡힌다"라며 스스로 영웅이 된 '박열'과 씨익 미소를 보이며 그와의 동거를 택한 '가네코 후미코'의 눈빛처럼 <박열>은 확고하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길만을 걷는다.


"내 육체는 어찌할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너희들이 어쩌지 못한다"


<박열>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가네코 후미코'다. '박열'(이제훈)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붙잡힌 그와 달리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조선인을 사랑했고 그를 따라 '행동'한 '가네코 후미코'가 자연히 어떤 식으로 다루든 더 매력적인 캐릭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와 '박열'의 멜로는 웃기고 차갑다. 재판정에 조선의 관복을 입고 나타나는 신을 비롯해, '후미코'가 자신을 조롱하는 일본인들에게 눈을 치켜뜨고 호통을 치는 컷과 검사를 조롱하듯 심문하는 신과 같이 <박열>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아주 많다.


박열의 변호를 맡은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야마노우치 타스쿠)


게다가 배우들 역시 과장되거나 이물감을 주지 않고 자연스러운 연기로 활력을 준다. 디렉팅에 있어 스타일보다 중요한 것은 조화다. 이준익이라는 이름은 흑백과 칼라에 모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주연만을 돋보이게 하지 않으며 유머가 이야기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며 또한 그는 자신의 위치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연출자로서 챙겨야 할 역할들에 소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단연 인상적인 투샷. 실제 두 인물의 사진과도 닮아 있는데, 영화를 통해 두 사람이 이런 사진을 찍게 된 배경도 확인할 수 있다.


<박열>을 보면서 해소되지 않은 생각 딱 하나. <추격자> 이후 스릴러가 범람한 것처럼,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특히 다수의 시대극이 나온 것처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봇물을 이루는 것에 벌써부터 피로감이 밀려온다. 단, <박열>처럼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다. '천만 영화'를 배출한 기성 감독이 저예산의 영화로 신인 배우를 발굴하고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조명한다는 것보다, 지금 이 땅의 주류 영화에 청신호를 가져다주는 행동이 또 있을까.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며 시류에 쉽게 물들지 않았으나 끝내 시대를 관통하는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격동의 삶을 보았다. (★ 7/10점.)



<박열>(2017), 이준익

2017년 6월 28일 개봉, 129분, 12세 관람가.


출연: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민진웅, 김준한, 권율, 백수장, 배제기, 야마노우치 타스쿠 등.


제작: 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배급: 메가박스(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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