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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24. 2017

형식이 이야기가 되고, 공간이 형식이 되는 영화

<더 테이블>(2016), 김종관

<더 테이블>은 형식이 이야기가 되고, 공간이 형식이 되는 영화다. 하루 동안 벌어지는 네 개의 에피소드가 각자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나의 시간대가 지나가면 곧이어 다음 시간대가 찾아온다. <더 테이블>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카페의 테이블인 것이며, 그 안에 머물렀다 지나가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관망하는 것만으로 영화의 상영시간을 고스란히 채운다. 흔히 영화가 인물을 보여주는, 카메라가 담는 방식은 관객과 인물 사이의 거리를 결정짓게 되는데, 여기서는 대체로 두 가지 아이러니가 작용한다.



하나. 아주 가까이에서(주로 인물의 상반신 정도만 보이는 바스트 샷이나 그 이상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이 많다) 인물들을 비추고 있지만 관객은 시종 카페의 옆 테이블 손님을 엿보듯이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몇 토막을 가져다 듣게 되는 것이다. 근접한 시선에서 인물을 조망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캐릭터의 거리를 넓히는 비결은 의도적으로 제한된 정보량에 있으며, 에피소드 하나당 15분 남짓한 이야기에서 이는 아주 적절하다. 일체의 플래시백도 설명도 없는 이 영화에서 서사의 기승전결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며 감정적으로 공감대를 제공할 필요도 없다.



네 명의 여자들과 네 명의 남자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관객은 상상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이며, 이 카페에 들어오기 전 어떤 삶을 살아왔을 것이며, 카페를 나선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각 에피소드의 초반부에서는 대화와 표정을 통해 단서를 짚어가고 특정 신에서는 인물의 어떤 언행에 감응하게 된다. 마침내 이야기의 윤곽이 잡힐 무렵이면 영화는 어김없이 다음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스타가 된 '유진'(정유미)와 전 남자친구 '창석'(정준원)이 지나간 자리, 물 잔에 담긴 물을 꽃이 머금는 동안 이내 '경진'(정은채)와 '민호'(전성우)가 자리를 잡는다.



둘. 관객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프레임 안의 인물을 훔쳐보지만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영화가 남긴 이야기의 여백을 채우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몇 마디 말과 표정, 몸짓으로 누군가의 인물됨과 인생사에 대해 쉽게 속단하거나 유추하곤 하는데, 그러는 사이 관객의 추론은 영화가 조금도 보여주고 들려주고 말하지 않는, 영화 바깥으로 향한다. 어쩌면 여기에는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다른 관객들의 리액션도 작용할 수 있으며, 그 또한 연출자의 의도로 보인다. 관망하지만 몰입하고, 훔쳐보지만 곁에 있게 되는 네 개의 에피소드에는 매번 빈자리가 있다.



일주일 남짓의 기간으로 완성된 경제적인 연출과 각본은 비교적 일관되게 상기 언급한 두 가지의 속성을 고수한다. 그것의 완성이 바로 이들의 지나간 빈자리인데, 무슨 이야기인 지 슬쩍 감이 잡힐 듯하면 영화는 인물들을 퇴장시킨다. 이따금 책을 읽는 카페 주인, 마시다 만 커피 잔, 누군가 앉았던 빈 의자들이 비로소 등장한다. <더 테이블>이 네 개의 독립된 단편으로서 한 편의 장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명백히 그 사이의 여백에 있다. 관객이 '혜경'(임수정)과 '운철'(연우진)의 이야기에서 어떤 여운을 느끼는 건 영화가 그들의 캐릭터를 구축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중도에 퇴장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흘러가버리고서야 그들의 이야기가 끝났음을 실감하며 관객은 일말의 아쉬움을 느낀다.



만약 어느 카페에 앉아 오전부터 자정 무렵까지 그곳의 사람들을 계속 관찰한다면, 어느 누군가는 반드시 이 영화 속 손님들의 모습과 닮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 남아 있는 공간에서 관객은 그제야 테이블의 주인이 된다. 이제 카페 주인이 문을 닫고 하루를 마칠 시간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주인공이었던 이 카페 공간은 내일에서야 다시 문을 열 것이다. 이제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가 커피를 주문할 차례다. 어제의 공기가 켜켜이 공간에 스며 오늘의 공간에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들이 대신한다. 어제 봤던 옆자리 손님의 이야기를 한 토막 떠올리다 보면, 당신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접한 당신 자신의 이야기로 오늘을 채워가게 된다. '더 테이블'은 어느 누군가의 테이블이 아니라, 이야기가 거쳐간 바로 그 테이블이다. (★ 8/10점.)



<더 테이블>(2016), 김종관

2017년 8월 24일 개봉, 70분, 12세 관람가.


출연: 정유미, 한예리, 정은채, 임수정, 정준원, 김혜옥, 전성우, 연우진 등.


제작: 볼미디어(주)

배급: (주)엣나인필름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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