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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3. 2017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여성들을 위하여

<우리의 20세기>(2016), 마이크 밀스

이 영화를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산타바바라를 배경으로, 10대 소년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두 사람과 같은 집에 살았던 두 여성과 한 남자의 이야기. 너무 무책임한 줄거리 요약 같지만 이건 사실이다. 이 영화의 사건과 인물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제목에 너무나 충실한 영화라는 의미다. 국내용 제목인 <우리의 20세기>에도 그렇고, 원제인 <20th Century Women>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20세기>는 20세기의 이야기와 인물을 21세기의 감각과 감성으로 표현한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과 숙고를 거듭하다, 그 중심을 시대에서 찾기로 했다. 두 시대로 구분하면 1924년생의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의 시대가 있으며 1964년생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의 시대가 있다. 비교적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빌리 크루덥의 '윌리엄'을 포함한) 다섯 캐릭터의 균형이 고르게 되어 있는 이 영화의 서사과 인물 구조는 두 사람에게 수렴한다. 더 나아가 10대 소년 '제이미'의 서사는 곧 50대 어머니 '도로시아'를 향한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미리부터 결론짓자면 이는 단순히 세대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바다.


가장 상징적인 두 개의 신을 기반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 집안의 다섯 남녀와 주변 지인(으로 보이는)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 문득 시작된 '애비'(그레타 거윅)의 일장연설은 어느새 테이블에 앉은 모든 남녀를 압도한다. '애비'의 주도에 따라 ("자, '생리'라고 어서 말해봐!") '제이미'를 포함한 남자들은 타의적으로 "생리!(Menstruation)"를 외친다. 여기서 남자들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막으로도 표현되지만 처음 그 단어를 들은 순간 그들은 "새, 생리..."라고 읊조린다. 다소 코믹한 이 장면에서 그들이 '생리'라는 단어를 선뜻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모습은 영화가 지향하는 거침없는 표현과 대조적으로 관객에게도 어떤 인상을 강렬하게 남긴다.


두 번째, TV를 통해 전해지는 지미 카터의 연설('Malaise Speech', 1979)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 연설 전체의 주된 내용은 에너지 위기에 관한 것이었지만, 영화에서 소개된 단락의 경우 주로 변화를 맞이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담겨 있다. 이는 한 10년이 지나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의 연도인 1979년이라는 상징성이 포함된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TV를 본 사람들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지만 '도로시아'가 홀로 연설에 적극 공감하는 반응을 표시한다. 아마도 그녀는 카터의 연설 중 "세상의 변화와 그에 따른 불확실성이 곧 현재의 삶 자체에 대한 회의와 의심으로 이어진다"는 부분에 대해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에서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10~40대로 모두 그녀보다 젊다. 어쩌면 그들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황금기로 살고 있는 이들이며, 그녀, '도로시아'는 그들을 바라보는 지난 세대에 해당한다.


'애비'(그레타 거윅)


앞서 언급한 이른바 '생리 장면'은 영화가 4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현재의 사회에서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금기시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말들이 있다. 그중 상당수는 성에 대한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들 사이에서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란 마이크 밀스 감독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 '제이미'의 주변 인물들을 자신의 경험에서 일부 창조했다. (실제로 그는 1920년대 생의 어머니에게서 196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냈다.) 이런 장면은 웃긴 장면이지만 이 영화가 '1979년'을 대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미 카터 연설 장면'은 어느 시대에나 미지의 다음 시대에 대한 두려움이 실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대공황 시절'을 지나며 굵직한 변혁들을 겪으며 삶의 중반을 지나온 '도로시아'는 지미 카터의 말에 적극 공감했겠지만 한창 젊은 사람들이야 같은 내용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몇몇 장면들을 떠올리며 정리한 이런 생각들에 마침표를 찍는 건 영화의 내레이션이다.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와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출생과 자라온 시절을 회고하는 내레이션 분량이 있는데, 내레이션의 주된 내용은 자신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회고적인 시점으로 구성돼 있다. 말하자면 이미 20세기를 지나온 사람들이 70년대 말 자신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일부 장면들에서 색상이 왜곡되며 마치 빨리 감기하는 것처럼 편집한 것이 그 시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미 다음 일을 아는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건 그 자체로 아이러니와 유머를 담아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시대를 아는 시점에서 70년대 말 펑크 록 문화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을 보면 어떨지 상상해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도로시아'와 '줄리'(엘르 패닝), 그리고 '애비'


살아온 시대를 향한 예리한 통찰과 함께, 이 영화의 탁월함은 '도로시아'를 중심 축으로 하면서도 조금도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계몽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에서 나온다. '도로시아'는 '애비'와 '줄리'에게 아들 '제이미'를 '도와달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시점에서의) 아들의 일탈적 행동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는다. 집에 머무르길 좋아하지만 세상과 소외돼 은둔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고로 만난 소방관에게 저녁식사에 선뜻 초대할 만큼(그녀는 홈 파티를 자주 연다) 일면 개방적이기도 하다. 한 집(셰어하우스) 안에서 두 모녀를 중심으로 하여 함께 사는 세 명의 타인을 포함한 다섯 남녀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의 구성은 시트콤처럼 되어 있는데, 이는 연령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아우르는 효과가 있다.


영화 전체의 내레이션 중 '제이미'의 분량이 가장 많다. 그리고 '제이미'의 주변 세 여자들은 모두 신체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무언가의 불안정함을 하나 이상씩 안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의 행동은 영화적으로 두드러지는 게 아니라 현실의 여성들이 겪는 그것과 맞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독특하고 독자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낸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후보에 올랐던 이 영화의 각본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그 균형 감각과 현실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도로시아'


<우리의 20세기>는 서사와 캐릭터에 강렬한 충격(사건)을 애써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더라"며 추억하지만 과거에 젖지 않으며 그들이 시대의 변화를 느끼며 겪었던 불안감을 이해한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의 언행은 쉽사리 예측되지 않으며 관객에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어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는 영화의 미덕은 곧 좋은 태도로 이어진다. 문자 그대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영화 속 '제이미'의 태도는 곧 앞선 시대를 살았던 어머니 세대를 향한 감독의 태도와 같다.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곧 이 시대(나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어떤 메시지로 이어진다. "인생이 내 뜻 그대로 되는 경우는 잘 없더라"는 메시지 자체는 익숙하거나 식상할 수 있다. 그러나 서툰 우리의 삶을 모두 능히 보듬는 이 영화는 조금도 구태의연한 영화가 아니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OST를 언급하는 걸 빼먹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운드트랙들이 정말 좋다. 영화 속 시대를 직접 경험한 감독의 안목과 취향이 돋보인다. 당시의 배경과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 걸맞은 사진들을 곳곳에 배치한 구성 역시 적절하다. <우리의 20세기>는 신선한 재미와 섬세한 통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감성을 모두 담는 데 성공한다. 중년 아재 감독이 만든 세심한 페미니즘 영화, 그 이상이다. (★ 9/10점.)




<우리의 20세기> 국내 티저 포스터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 2016), 마이크 밀스

2017년 9월 27일 (국내) 개봉, 118분, 등급분류 진행 중.

*북미에서는 R등급으로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15세 관람가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출연: 아네트 베닝, 그레타 거윅, 엘르 패닝, 루카스 제이드 주만, 빌리 크루덥 등.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우리의 20세기> 해외 포스터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 @대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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