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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15. 2017

누군가에겐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한 마디 말

<아이 캔 스피크>(2017), 김현석

어떤 문제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을 두 가지로 지극히 단순화 시킨다면, 직구와 변화구가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후자다. 자신이 가장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미리 꺼내지 않고 나중에 가서야 슬쩍 보여주는 영화다. 여기에는 내적인 이유와 외적인 이유가 모두 있다. (국내에 한정) 요즘 관객들은 무겁거나 무거워 보이는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보면서 생각하고 보고 나서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보다 즉각적으로 즐기고 소비할 수 있는 영화를 명백히 더 선호한다. <킬러의 보디가드>가 대박을 터뜨리고 <남한산성>이 개봉을 한 주 미룬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관객들이 단순하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시기적으로 어떤 자극과 무게에 지쳐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17년은 여러모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중요한 해가 될 모양이다. 불과 한 달 사이에 할머니 두 분이 돌아가셨다. <귀향>의 조정래 감독은 그 후 여전히 해결된 것이 없다며 할머니들의 증언과 <귀향>의 편집된 장면들을 담은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선보였다. (9월 14일 개봉) 수요 집회는 1,300회째를 맞이했다. 미 의회 '위안부' 사죄 결의안인 'HR121'이 통과된 지 10년이 지났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그런 가운데 개봉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자연스럽게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군함도><택시운전사> 등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줄지어 개봉하는 시즌에 굳이 그걸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영화는 스승과 제자, 청년과 할머니, 혹은 뒤늦게 영어를 배우려는 할머니, '온 동네를 휘저으며'(시놉시스 중) 수천 건의 민원을 구청에 넣는 할머니, 이런 캐릭터와 관계 자체에서 해답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군함도>의 리뷰를 적으면서도 생각했지만, 특정한 역사나 사건이 상업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만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장르도 물론이다. 다루는 방식과 태도의 문제다.)



CJ 문화재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임을 고려해도 <아이 캔 스피크>의 각본은 그 자체로는 특기할 만한 점이 없어 보인다. 예고편과 시놉시스를 보는 순간 로그 라인이 거의 명확히 그려졌고 영화 역시 그 예상을 대체로 빗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 캔 스피크>는 꽤 괜찮은 영화에 속한다. 이는 단지 나문희와 이제훈이라는 배우의 힘만이 아니다. 흔히 감동 코드를 담고 있는 (한국) 영화들이 포함하고 있는 유머의 지점이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를테면 '민재'(이제훈)와 막걸리를 마시며 '옥분'(나문희)이 내뱉는 개그가 실없는 말이 아니라 실제 그녀의 과거와 연관이 있는 것들이다. 단지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 일정 수준의 웃음을 보장하기 위한 소모적 장치가 아니라 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이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과 꽤나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다.


가장 간단하고 익숙한 말이라도 ("아이 캔 스피크") 누군가에게는 입 밖으로 용기 내어 꺼내기까지 평생이 걸리는 일일 수 있다. 실제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을 하고 자신들이 겪은 일을 세상에 알리기까지도 수십 년이 걸렸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르는데, 그녀들에게는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용기를 내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가까스로 꺼낼 수 있는 '새로운 언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영화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단지 변화구이기만 한 게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헤아릴 줄 아는 섬세한 우회인 것이다.


구청 공무원인 '민재'는 구청에 매일처럼 찾아오며 산적한 민원들을 쏟아내는 '옥분'을 기계적으로 대한다. 단지 공무원이어서가 아니라 '민재'라는 캐릭터는 말하자면 직진할 줄만 하는 인물에 해당한다. 그런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언어가 진정한 소통의 매개체라기보다는 공인 영어 성적을 위한 수단에 그쳤을 것이다. 반면 '옥분'은 겉으로는 사소한 것까지 '불필요하게' 민원을 제기하고야 마는 민폐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아픔만큼 주변을 헤아릴 줄 아는 사려 깊은 인물이다.



'옥분'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관객들이 확인하게 되는 순간 <아이 캔 스피크>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러나 관찰자인 '민재' 대신 주인공 '옥분'의 과거와 그녀가 왜 영어를 배워야만 했는지 그 전말이 드러나는 순간 <아이 캔 스피크>는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단지 "잊지 않겠습니다" 같은 말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공허함 외침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재를 대하는 태도와 인물의 사연을 천천히 그러나 섬세하게 헤아리는 자세, 여기에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만나자 이 영화는 추석 시즌 극장가의 강자로 부상했다.


'옥분'과 '민재'는 두 사람 모두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계기로 서로 공감하게 되고 또 세대를 뛰어넘은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나이나 언어와 같은 장벽을 뛰어넘는 일. "아임 파인 땡큐 앤 유"처럼 단순하고 간단한 말도 누군가에게는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세상에는 좀 더 많은 일들이 가능해질 수 있다. (★ 7/10점.)



<아이 캔 스피크>(2017), 김현석

2017년 9월 21일(목) 개봉, 119분, 12세 관람가.


출연: 나문희, 이제훈, 이상희, 염혜란, 박철민, 손숙, 김소진, 정연주, 성유빈, 이대연 등.


제작: 영화사 시선

배급: (주)리틀빅픽처스, 롯데엔터테인먼트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작.(9/6(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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