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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02. 2017

근래 보기 드문 순수한 청춘 드라마의 귀환, 그리고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 츠키카와 쇼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더니 조심스럽게 킥킥 웃었다. 표정 변화가 극심한 인물이다. 도저히 나와 똑같은 생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른 생물이니 당연히 수명이 다른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나도 너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런 얘기 안 해. 다들 슬퍼하잖아. 근데 넌 대단해. 머지않아 죽는다는 클래스메이트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주잖아. 나라면 아마 못했을 거야.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막 하는 거야."
"너무 높이 평가해주셨네."
진짜로, 정말로.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는 내 앞에서 슬픈 표정은 안 하잖아. 혹시 집에 돌아가서는 나를 위해 울어준다거나?"
"안 울어."
"좀 울어주지."
울 리가 없다. 나는 그런 비합리적인 짓은 안 한다. 슬퍼하지도 않고, 더구나 그녀 앞에서 그런 감정을 내보일 일도 없다. 그녀가 남들 앞에서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걸 대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40쪽 중에서)(소미미디어, 2017)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컷


영화의 제목은 첫인상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외화는 물론 한국 영화조차 기획 혹은 개봉 준비 단계에서 제목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첫인상에 있어 중요하다는 말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제목만 접했을 때 일종의 거부감이 들 수 있음을 안다는 의미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전부일까. 모르는 사람의 이름만으로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여자일까, 남자일까와 같은) 일종의 판단을 하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접하기 전의 느낌에 불과하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제목만으로 비록 인터넷상에서 일부의 반응이지만 거부감을 넘어 혐오감까지 표시하는 이들을 본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그건 거기까지 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영화에 참여한 이들 혹은 작품에 대한 비난까지 용인되지는 않는다. 마땅히 별개의 문제다.


이 작품은 늘 곁을 스쳤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두 사람이 우연한 일을 계기로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다. 학급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그녀'(하마베 미나미)는 모두에게 상냥하고 언제나 밝고 또 맑은 인물이다. (두 사람의 이름을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은 스미노 요루의 원작 소설에서 이름이 비교적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원작자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다.) 반면 '그'(키타무라 타쿠미)는 말 없고 존재감 없는 인물이다. 학교 도서관의 도서 위원을 자청하며 '그'는 사람보다는 책과 훨씬 더 가깝고 편안해 보인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컷


잠시 영화의 첫 장면을 돌이켜 보면, 성인이 된 '그'(오구리 슌)는 학생들에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진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대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원작에 없는 '12년 후'가 영화에 추가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컷


앞서 원작 소설의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초반부 한 페이지를 인용한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 때문이다.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 '사이 좋은 친구' 등 '그'와 '그녀'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는 이 세상 수많은 '관계'들 중 두 사람의 그것을 오직 두 사람만의 고유한 것으로 만든다. 나아가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소설에서든 영화에서든 단지 '우정', '사랑', '친구' 같은 특정 단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말 그대로 사이 좋은 친구라고 해도 좋고, 클래스메이트지만 다른 클래스메이트와 달리 '비밀을 알고 있는' 정도의 사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려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꼼꼼하게 노트에 적어 그걸 '공병문고'라고 부른다. 병원에 갔다가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 노트를 발견한다.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러브레터>(1995)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 같은 영화들의 특징은 시간의 흐름을 단지 이야기의 구조로서만이 아니라 인물의 기억과 그에 대한 감성을 관객에게 전하는 데 효과적으로 쓴다는 점이다. 12년 후 '그'는 그때는 알지 못했던 '그녀'의 마음과,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녀'를 대하는 자신의 감정까지 깨닫게 된다. 여기에 첫 장면에 언급되는 [어린 왕자]가 중요하게 작용하며 책, 도서관, 노트와 같은 물리적 소품과 공간들이 인물의 내면을 훌륭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내면, 그 기억은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떠올려야만 하는 것들이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컷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컷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실은 작품을 봐야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다친 부위에 해당하는 다른 대상의 장기를 먹는 것'의 의미에 대해 소설과 영화 모두에서 충분하게 설명되지만, 이는 상술한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와 같은 '그'와 '그녀'의 일종의 언어로서도 기능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서로만이 교감할 수 있는 언어로 우연한 사건을 통해 특별한 추억을 만들게 된, 일상의 사소함을 특별함으로 만들어 낸 두 사람의, 꽃다운 청춘에만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 담긴 작품이다. 원작자 스미노 요루는 스스로 밝히길 "튀어 보이고 싶어서 지은 제목"임을 인정했지만 이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소중하고도 아련한 추억에 관한 이야기가 가능한 더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순수한 뜻이 아니었을까. (★ 7/10점.)


최근 중견 배우 한 명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동시기 예정되어 있었던 VIP 시사회 등 영화계 행사들 상당수가 취소되거나 축소, 연기되었고 영화계와 연예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여기서 한 배우가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린 "부디 RIP"라는 말이 일부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추모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해야만 가능한 게 아니다. 다음 날 어느 스타 커플의 결혼식을 두고도 말이 나왔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너무 쓸데없이 관심이 많다. 아니, 관심은 가질 수 있으나 타인의 감정, 타인의 생각, 타인의 의도를 너무나 쉽게 재단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건 나만의 상념일 수 있으나, 타인을 대하면서 사용하는 '표현'의 의미와 본질에 있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것이 무리한 귀결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물론 가볍게 무시할 수는 없으나 더욱 중요한 건 그것의 맥락이며 속 뜻이다. 숨은 의미는 조금만 더 공감의 노력을 기울이며 숙고할 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쾌감이 드는 표현일지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표현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마음일 수 있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국내 메인 포스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君の膵臓をたべたい, 2017), 츠키카와 쇼

2017년 10월 25일 (국내) 개봉, 115분, 12세 관람가.


출연: 하마베 미나미, 키타무라 타쿠미, 오구리 슌, 키타가와 케이코, 오모토모 카렌, 야모토 유마 등.


수입: (주)미디어캐슬

배급: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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