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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07. 2018

모든 시작하는 것들을 위하여

<4월 이야기>(1998), 이와이 슌지

실은 많은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는 것 중 하나가 일상성이다. 어서 내러티브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어떤 변화를 주고 사건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경제적인 상영시간을 위해, 핵심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지 않은 가지들은 짧아지거나 잘라지곤 한다. 많은 관객들이 상업영화의 초반부를 필요 없는 부분인 것처럼 경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깥 가지들은 중심 가지를 풍성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단순한 말초적 자극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면 반드시 그 영화는 단 1초도 버릴 장면이 없다.


어쨌든 대중적인 영화 문법에 길들여져 있다면 <4월 이야기>(1998)는 완벽히 피해야 할 작품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영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려 할 무렵에 이야기가 끝난다. <4월 이야기>에는 시작만 있다. 일본의 4월은 신학기다. 사실상 "홋카이도에 사는 '우즈키'가 도쿄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다" 정도만이 <4월 이야기>의 서술적 줄거리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일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나면 설명하기 힘든 여운과 이야기가 남긴 잔상과 설렘이 있다.



그건 <4월 이야기>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67분짜리 영화에서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도쿄로 이사를 오는 데에 10분이 걸린다. 그다음 10분은 대학에 입학 후 첫 수업에서 학생들과 통성명을 한다. 그다음 10분은 서점을 찾아가고 서클에 가입한다. 이렇게만 적으면 아무런 사건이 없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와이 슌지의 각본과 연출은 이 무미해 보이는 일상성에 향기와 계절을 부여한다. 하루 일주일 그렇게 한 달, 완연히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동시에 '우즈키'(마츠 다카코)여서만 가능한 바로 그 이야기를 이와이 슌지는 한다. TV 시리즈를 연출하다 영화로 넘어오면 범하기 쉬운 호흡 조절의 실패가 있는데, 이와이 슌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더불어) 그로부터 완전히 비껴간 연출자이자 이야기꾼인 게 분명하다.


처음을 마주하는 순간의 떨림, 처음이라는 것 자체의 어떤 긴장감, 그리고 그 각각의 처음들이 있어야 했던 이유와 다음 한 걸음을 위한 머뭇거림, <4월 이야기>의 67분은 그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다른 표현이 좋겠다. 시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싱그러운 시선이 있다. (★ 8/10점.)



<4월 이야기>(四月物語, 1998), 이와이 슌지

2000년 4월 8일 (국내) 개봉, 67분, 12세 관람가.


출연: 마츠 다카코, 다나베 세이치, 루미, 후지이 카호리, 미츠이시 켄, 에구치 요스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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