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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13. 2018

우린 과거를 추억처럼 딛고 살아갈 수 있을까

<러브레터>(1995), 이와이 슌지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 권남희 옮김, 집사재, 1998, 142~143쪽 중)



("이런 감기 같은 사랑이라니!")


<러브레터> 스틸컷


감기는 앓고 나면 나아도 영구적인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다. 언제든 다시 걸릴 수 있다. (감기약은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치료제가 아니라 증상을 완화시키는 회복제의 역할을 할 뿐이다.) <러브레터>의 사랑, <러브레터>의 과거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히로코'는 처음에는 '이츠키'(남)가 자신을 사랑한 것이 그저 '이츠키'(여)와 닮은 외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슬퍼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다루는 '이츠키'(여)와 '이츠키'(남)의 사랑 이야기가 그 자체로 대단히 완결적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그렇게 신화적인 존재가 된다.


우리는 많은 경우 누군가의 '두 번째 이후'의 사랑이다. 다만 그 자체가 사랑의 속성을 옅어지게 하거나 사랑의 가치를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러브레터>의 과거로부터 온 편지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것과 타인의 것 모두) 과거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동시에 그 과거를 딛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 영화의 과거는 현재의 '히로코'와 '이츠키'(여)가 주고받는 편지로 인해서 의미가 달리 정립된다. 아니, '이츠키'(여)는 거의 완전히 잊고 지내다시피 했던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게 되고, '히로코'의 입장에서는 '이츠키'(남)의 첫사랑을 새롭게 깨닫는다. 과거는 완결된 사건이지만 가변적인 현재로 인해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러브레터> 스틸컷


후지이 이츠키 님.
이 추억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당신을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습니다.
또 편지를 쓰겠습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 중에서)


<러브레터> 스틸컷


(이와이 슌지가 쓴) 원작 소설에서 '히로코'의 이야기는 '히로코'로 서술되나 '이츠키'(여)의 이야기는 '나'로 서술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두 번째 이후의 사랑이 아닌) '첫사랑'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독은 원래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편지의 내레이션으로만 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1인 2역을 통해 현재를 캐릭터화 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인 것으로 여겨진다. 일명 "오겡끼데스까" 신에서 '히로코'와 '이츠키'(여)의 교차되는 이미지와 대사는 죽은 '이츠키'(남)를 매개로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더 긴밀하게 만든다. 또한 '아키바'라는 인물은 작품의 톤을 조절하면서, 이야기를 나아가게 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관객을 위한) 정보 전달의 역할까지 하는 독특한 캐릭터다.


시노다 노보루의 촬영과 레메디오스의 음악, 이와이 슌지의 각본과 연출이 더해져 <러브레터>는 그렇게 사랑을 다루는 일본 영화 중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다. 스스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거의 정확하게 원하는 방식으로 담아낸 드문 작품이다. (게다가 원작자가 직접 연출한 사례임을 감안해도 각색이 거의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소설을 90% 이상 그대로 옮겼다. 기획부터가 명확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나, 국내에 개봉한 일본 실사 영화 중 <러브레터>의 극장 흥행 기록을 넘은 영화는 지금껏 없다. 앞으로도 쉽게 나오진 않을 것이다. (★ 9/10점.)


<러브레터> 스틸컷



*북티크 논현점 '무비톡클럽' 열한 번째 상영작(@201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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