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 휠>(2017), 우디 앨런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면서 낭만적이라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다. 그나마 최근작을 예로 들자면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과거를 바라보는 향수 섞인 시선, <로마 위드 러브>(2012)의 유머 가득한 옴니버스식 만담, <매직 인 더 문라이트>(2014)의 잠시 시니컬한 태도를 내려놓은 듯한 사랑 이야기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 <카페 소사이어티>(2016)에서도 영화 전체의 정서와는 있지만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그리는 일말의 달콤함이 있었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영화 속 인물이 누구와 사랑에 빠질지 보다 몇 명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지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가운데, 작 중 배경이 되는 도시에 한 번쯤 직접 가보고 싶다고 느끼는 가운데, 우디 앨런의 영화가 주는 경험은 분명히 환상이 아니다. 치열하진 않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으면서도 과거의 향수나 미래의 갈망마저도 현재의 복잡한 감정 아래 놓여 있는 인물들의 모습과 상황을 비틀고 관찰하는 장치로 활용해왔다. 최근 그의 영화들이 비교적 중산층의,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사교계의 인물들을 다뤄왔다면 <원더 휠>의 인물들을 가장 잘 아우를 수 있는 말은 '소시민'일 것이다.
작년 겨울에서 봄으로 슬며시 넘어가던 무렵에 뉴욕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숙소는 브루클린 칼리지(Brooklyn College) 인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혹은 나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겠지만) 우디 앨런 역시 브루클린 출생이다. 일주일 정도 뉴욕에 머무르면서 다녀보지 못한 곳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브루클린 남부의 휴양지 '코니 아일랜드'다. 영화 <원더 휠>의 배경이 바로 여기다. 본래 섬이었으나 지금은 반도가 된 이곳을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해변에 자리 잡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대관람차, 파스텔톤의 의상과 솜사탕 같은 것들일 테다. 시얼샤 로넌 주연의 영화 <브루클린>(2015)에서도 잠시 배경으로 등장한다. <위대한 쇼맨>(2017)의 주인공인 'P. T. 바넘' 역시 이곳에서 서커스 무대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원더 휠>의 무대인 코니아일랜드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지니'(케이트 윈슬렛)가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는 삶의 터전인 이곳은 남들에게는 여행을 오거나 휴식을 위해 찾는 휴양지지만 '지니'에겐 그저 쳇바퀴처럼 일과 삶에 찌든 답답한 공간일 뿐이다. 그녀는 식당 근처의 집에서 첫 번째 남편의 아들과, 두 번째 남편과 같이 살며 인근의 경품 사격장에서 나는 총소리를 끔찍이 싫어한다. 아들 '리치'는 어째선지 수시로 불장난(글자 그대로, 정말 '불'장난이다.)으로 부모 속을 썩인다.
이만큼만 설명해도 '지니'는 흔한 영화 속 로맨스의 주인공과 거리가 멀다. 여기서 '지니'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자 영화의 화자에 해당하는 '믹키'(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등장한다. 해변의 안전요원인 그는 마치 '지니'를 현실의 수렁에서 구조해줄 것만 같은 남자다. 한때 배우였다고 하는 '지니'의 이야기에 맞장구도 쳐주고 희곡 작품에 관한 대화도 즐긴다. 두 사람의 관계에 일말의 진전이 이루어지려던 차에 '지니'의 현 남편 '험티'(짐 벨루시)의 딸인 '캐롤라이나'(주노 템플)가 예기치 못하게 '지니'와 '믹키' 사이에 끼어들게 되면서 <원더 휠>의 이야기는 정말로 바퀴처럼 굴러간다. (실은 <원더 휠>은 '캐롤라이나'가 코니아일랜드에 나타나 '원더 휠' 관람차를 뒤로한 채 '지니'가 일하는 식당에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느 멜로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삼각관계의 설정인가 싶지만 <원더 휠>의 관심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이 관계를 포장하거나 아름답게 그리려는 의도도 없으며 종종 관객을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디 앨런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은 것 같은 '지니'의 아들 '리치'(잭 고어)는 '지니'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 외에는 뚜렷한 역할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캐롤라이나'를 뒤쫓는 의문의 두 남자는 후반까지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더 휠>의 관심은 '지니'라는 여인의 내면에 있다.
'원더 휠'이라는 역설적인 제목, 남들에겐 놀러 오는 곳이지만 '지니'에겐 그저 생계를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삶의 터전인 코니아일랜드, 이런 배경을 뒤로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요소들은 오로지 '지니'의 속을 긁고 괴롭히거나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장치처럼 여겨진다. 특히 '믹키'를 놓고 방 안에서 나누는 '지니'와 '캐롤라이나'의 대화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지니'의 관심은 오로지 '믹키'가 '캐롤라이나'에게 추근거렸는지, 키스를 했는지, 그뿐이다. 바깥 조명의 변화로 인해 '캐롤라이나'의 얼굴색과 '지니'의 얼굴색이 선명히 대비되면서 시시각각으로 표정과 얼굴의 온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이미 아스피린을 여섯 알이나 먹은 '지니'의 부글거리는 심리에 '캐롤라이나'가 불을 지피고,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리치'의 불장난과 생활고, 기껏 생일선물을 준비했더니 애매하게 선을 긋는 '믹키'의 태도까지. <원더 휠>의 모든 바퀴는 한바탕 난장판을 벌이며 '지니'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요동치는 마음을 관망한다. 몇몇 장면에서 돋보이는 영화의 색감 활용은 '지니'가 조금도 호감을 표시하지 않는 대상들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는 하나 아름다운 미장센을 만든다기보다 이 연극적인 인물들의 군상에 조금 더 양념을 가하는 정도다.
분명 <원더 휠>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럼에도 흥미로운, 엉뚱하거나 귀여운 소품 같은 영화다. 다만 <블루 재스민>이나 <카페 소사이어티>를 볼 때만큼의, 그 이상의 감흥과 잔상을 주지는 않는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와 그녀를 바라보는 영화의 촬영은 훌륭하지만 영화의 각본은 인물을 생생한 캐릭터로 만들기보다 무대 위의 장치처럼 보이게 한다. 인물의 성격과 기분을 강조하는 과시적인 각본이기도 하고, '캐롤라이나'의 과거는 소비적이며 '리치'와 '험티' 역시 근래 우디 앨런 영화의 캐릭터 중에서는 생동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오로지 '지니' 혹은 케이트 윈슬렛만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입체적인 활약을 펼친다.
내 옆의 그는 몇 번이고 했던, 내가 싫어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또 할 것이고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를 순간을 위해,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을 (아마 어제 했던 것처럼) 또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퀴는 놀랍게도 또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고 나서야 깨닫는다. 아 인생은 그렇게 놀랍지 않구나. 누군가에겐 휴양지이지만 나에겐 그저 삶의 터전, 이곳에서의 끝없고 덧없는 쳇바퀴처럼 말이다. <원더 휠>은 애초에 낭만적인 로맨스 영화가 될 생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보다 집중해야 할 것은, 보는 관객도 같이 두통에 걸릴 것 같은 '지니'(케이트 윈슬렛)의 마음이다. 자신의 궁상맞은 현재를 있게 만든 바로 그 과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 6/10점.)
<원더 휠>(Wonder Wheel, 2017), 우디 앨런
2018년 1월 25일 (국내) 개봉, 101분, 15세 관람가.
출연: 케이트 윈슬렛, 저스틴 팀버레이크, 주노 템플, 짐 벨루시, 잭 고어 등.
수입: 그린나래미디어(주)
배급: (주)팝엔터테인먼트
*브런치 무비패스 관람(2017.01.18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원더 휠> 메인 예고편: (링크)
다시 보니 <원더 휠>의 해외 포스터가 영화를 아주 훌륭하게 압축한다. 의도적으로 케이트 윈슬렛의 크레딧은 네 배우 중 가장 마지막에 표기돼 있으며, 책을 펼쳐놓았지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 뒤로는 대관람차 '원더휠'의 모습이 창문으로 인해 가려져 있다. 과연 그녀의 삶에 빛은 찾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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