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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18. 2018

아쿠아맨이 필요했던 날이라고 생각했던,

4월 16일, 망각과 무지와 착각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협력하는 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 진실은, 우리가 경제 성장이라는 분칠 속에 감춰둔 한국사회의 민낯일지도 모르겠다. 이 민낯을 마주 대하는 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어차피 내가 아는 한, 한국사회는 원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혹은 안일하게도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그 얼굴이 점점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한 것만은 부끄럽다. 그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그건 진보에 대해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래서 테이레시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며,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역사는 진보한다고 우리가 착각하는 한, 점점 나빠지는 이 세계를 만든 범인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은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한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자신의 실수만을 선별적으로 잊어버리는 망각,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나만은 나아진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게 바로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이다. 우리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으로 선출한 권력은 자신을 개조할 권한 자체가 없다. 인간은 스스로 나아져야만 하며, 역사는 스스로 나아진 인간들의 슬기와 용기에 의해서만 진보된다."


(김연수,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테이레시아스여', [눈먼 자들의 국가] 중에서, 문학동네, 2014)


시간이 지난다는 것만으로는 달라지지 않는 게 있다. 중학교 때 어렴풋한 기억 속 TV 화면의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을 떠올리며,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앞, 9/11 메모리얼에 빼곡히 음각된 희생자들의 이름 앞에서 숙연해진 적이 있다.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라도 그건 사람의 이야기기 때문에 그렇다. 늘 하고 다니는 <사운드 오브 뮤직> 마리아 배지가 조금은 발랄해 보여서, 오늘은 노랑색의 뭔가를 지니면 좋겠다 싶었지만 마땅한 게 없어 꺼내고 꺼낸 게 마침 DC코믹스의 '아쿠아맨' 배지. 아쿠아맨은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히어로다. 문학을 비롯해 가상의 서사는 현실의 뭔가를 달리하고 싶었던, 그러나 달리할 수 없이 그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곤 한다. 막연히 영웅의 존재를 고대하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기며 하릴없이 뉴스를 지켜봤던 그날을 떠올리며 [눈먼 자들의 국가]를 집을 나서기 전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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