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2016), 윤가은
(내 마음에 들어와 색연필로 봉숭아를 칠해줘, 하지만 금을 밟지는 말아줘. 그랬으면 좋겠어.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그러면 내가 김밥 싸서 집에 갈게, 숙제하고 놀자. 그냥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아.)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전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 상대는 아무 생각 없이 건넨 말에도 나는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마음이 쓰일 수 있다. 관계는 만드는 건 쉽지만 지키기는 어렵다. 우리는 눈높이가 같아도 저마다의 마음의 높이가 다르다. 날 나만큼 바라봐 줬으면 하는 마음들이 서로의 금을 키재기하고 가끔은 올라서다 밟기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렇게 말하고야 만다. "너 나한테 진짜 왜 그래." 성인이 되어가면서 터득해가는 것 중 하나는 마음을 숨기거나 포장하는 방식일 것이다. 자신을 가장하는 데에 능해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어른들은 "애들끼리 무슨 일이 있을 게 뭐 있냐"고 하지만 '선'에게도, '윤'에게도 친구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들은 성인과 다르지 않다. 다만 더 약하고 더 다치기 쉬울 따름이겠다.
하늘색 매니큐어를 칠해보지만 물들였던 봉숭아는 여전히 손톱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선'의 손톱에 남은 색깔들은 마치 상처처럼 보인다. 친구에게 빌린 매니큐어는 다른 친구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했던 바다의 색을 닮았다. 상처는 되돌릴 수 없게 된다.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 위축된 마음은 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덧입힌다.
'우리'라는 말은 너무나 쉽고 흔하게 쓰여서 가끔은 이 말에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그건 그 누구도 아닌, 단둘을 칭할 때 일종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준다. 나는 너와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이 통했으면 좋겠다. 높이를 맞추고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육교를 하나 놓아주면 좋겠다. 싫어하는 아이에게 맞으면 한 대 더 때려주고 싶지만, 좋아하는 친구라면 그냥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 여전하다. 영화의 처음과 다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 놀이 중 빠지게 된 '선'과 '지아'의 시선은 계속 엇갈린 채 서로를 이따금 향한다. 그러다 마침내 다시 눈을 마주친다. 상처 난 마음에 밴드를 붙이고, 우리는 다시 우리가 되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둘은 앞으로도 다치고, 울게 될 것이다. 다만 그리하여 생겨난 흉터들이 서로를 끝내 자라게 할 것이다. <우리들>(2016)의 카메라는 우리들이 어떤 높이로든 지나왔을 지난 마음들을 바로 그 자리에서 헤아리고 있다. 종종 흔들리지만, 감춰둔 마음을 꺼내 보일 땐 정확히 멈춰 서 있다. 이 영화에 그때의 나와 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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