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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04. 2018

고요한 일상 속에 숨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았다>(2017), 자비에 르그랑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사랑의 수명과 의지를 다한 것으로 보이는 부부와 각자의 변호사, 그리고 양육권을 중재하는 판사. 아이의 진술을 판사가 먼저 읽어주고, 남편을 자신과 자녀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려는 여자와, 아빠로서 아이들과 왕래하고 싶어 하는 남자는 서로가 아닌 판사를 향하여 앉은 채, 가능한 말을 아낀다. 어쩌면 가능한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가족이라 부를 수 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컷


'줄리앙'은 아빠를 '그 사람'이라 칭한다. 아마도 법원은 주말마다 아빠가 아들을 만날 수 있도록 (양육비 규정을 포함한) 관례적인 판결을 한 모양이다. '줄리앙'과 아빠 '앙투안'의 첫 대면에서 관객은 이미 이 관계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낌새를 알아챌 것이다. 엄마 '미리암' 역시, 자신의 연락처와 실제 거주지를 남편에게 알리지 않으려 하며, 새 아파트를 둘러보는 가족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알 수 없이 역력하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2017)는 이들의 과거에 대해 캐묻거나 나열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언제나 지금이다. 이미 해체된 가정의 매듭지어지지 못한 이야기는 이들의 남겨진 일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아내와 별거(이혼) 하더라도 자식만은 주기적으로 보고 소식을 나누고 싶어 하는 남자가 실상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든, 가족의 안전을 위해 남편을 더 이상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여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었든, 추측과 판단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관찰자인 관객은 스크린 너머 이들의 지난 과거의 일을 알 수 없다.


"영영 안 보면 좋겠어요. 그게 다예요"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11살 소년 줄리앙은
 엄마를 위해 위태로운 거짓말을 시작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놉시스)


기본적인 줄거리나 배경적인 것만으로는, 조금도 긴장을 주지 않는 잔잔한 드라마가 될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어쩌면 스릴러라고도 일정 부분 칭할 수 있을 만큼 당장 다음 신(Scene)에서 무엇인가 벌어질 것 같은 불안을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어쩌면 파괴되고 상처 입은 가족이 서로의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며 다시 평온한 일상의 행복을 미약하게나마 되찾아가는, 그런 영화이기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처음부터 마음먹은 적 없었으리라. 상영시간은 단 93분. 많은 이야기를 다뤄내기에 한없이 부족한 이 시간 동안 영화의 시선은 '줄리앙'과 누나 '조세핀'의 떨리는 눈빛에 담겨 있을 두려움을 응시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컷


내내 건조한 듯 보이는 시선으로 실은 아이의 불안을, 무엇인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집에 남겨진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헤아리며 관찰하는 이야기. 어쩌면 이보다 더 참담하기는 어려울 이야기. 가족의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의 모습 속에도 실은 깨질 듯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는 서늘함을 담은 이야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끝까지 가고야 마는 이야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 영화는 말하기를 아낀 채 조금만 보여준다. 어떤 경우, 보여주기조차도 꺼린 채 인물을 잠식해버린 공간의 분위기와 소리만으로, 얼굴의 표정을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화면 속 (상당수의 신에서 프레임 밖의 인공조명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인물의 눈과 입 너머의 불길한 떨림을 헤아리게 만든다. 언제든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던 힘이 차곡차곡 응축되어 맨 마지막 신에 이르러 기어이 폭발한다. 짧고 강렬한 분출이다. 그러자 소리 없는 엔딩 크레딧을 마주할 때면 영화의 맨 처음 신에서 양측 부모의 입장을 무심히 (이를테면, 엄마가 더 잘못했나, 아빠가 더 잘못했나, 싶은 시선으로) 관찰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나를 떠올린다. 누군가에게는 단지 그 시선만으로도 달갑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뒤이어 깨닫기도 한다. 마지막을 보았지만, 이 영화는 글자 그대로 영화 스스로의 93분만을 맺었을 뿐, 관객의 시간은 암전 된 스크린 너머 어딘가로 붙잡아 놓는다. 과연 무엇이 끝났으며 무엇이 끝나지 않은 채일까. 이다음의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 이야기를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을까. (★ 8/10점.)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내 메인 포스터

<아직 끝나지 않았다>(Jusqu'a La Garde, 2017), 자비에 르그랑 (*영제: 'Custody')

2018년 6월 21일 (국내) 개봉, 93분, 15세 관람가.


출연: 레아 드루케, 드니 메노셰, 토마 지오리아, 마틸드 오느뵈 등.


수입/배급: 판씨네마(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컷


*브런치 무비패스 관람(2018.06.04 대한극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외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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