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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08. 2018

딸이기 이전에, 독립적 주체로서의 당찬 자립

<흔적 없는 삶>(2018), 데브라 그래닉

작년에 가지 못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올해에는 꼭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폐막하기 하루 전에서야 가능했다. 사전에 예매를 하지 못했고, 줄거리를 읽어보면서 상영 시간이 알맞은 작품을 현장에서 고른 것이 <흔적 없는 삶>(2018)이었다. 감독의 이름이 낯설지 않아 찾다 보니, 오늘날의 제니퍼 로렌스를 발굴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윈터스 본>(2010) 등 주로 여성 주인공의 영화를 쓰고 연출해 온 데브라 그래닉이라는 감독이었다. (<윈터스 본>으로 그녀는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에 올랐다.) <윈터스 본>처럼 <흔적 없는 삶> 역시 원작이 있다.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은, 소설 [My Abandonment]를 기반으로 한다.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 끝자락에 위치한 광활한 삼림 지역, 포레스트 파크에서 몇 년간을 숨어 지내온 10대 소녀와 그의 아버지. 작은 실수 때문에 삼림 속에 숨어 지내던 그들의 삶이 발각되고, 이제 그들은 사회복지국의 책임 아래 인계된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갑작스러운 행정기관의 결정 앞에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린다. 완전한 독립을 찾아 황야로 나선 위험천만한 여행 속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바람과 분리된 삶을 유지해야 할 필요 사이, 두 가지의 욕망이 충돌한다.

(영화제 가이드북 내 <흔적 없는 삶> 시놉시스 중)


줄거리 일부를 사전에 읽으면서 얼핏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나 <룸>(2015) 같은 영화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막상 <흔적 없는 삶>은 상기의 두 영화와는 많이 다르게 다가온다.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 오늘날의 인간은 국가와 지역 사회의 법제화된 울타리를 벗어나서 살 수 있는가? 사춘기 소녀 '톰'과 아빠 '윌'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공원 숲속에 터전을 만들어 살아온 것으로 보이고, 최소한의 문명만을 누린 채 은둔자이자 자연인의 삶을 누리고 있다. '톰' 역시도 이 생활에 잘 적응한 채 아빠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표면적으론 여겨진다. 우연한 계기로 두 사람은 공원 관리 당국에 발각되고, 더 이상 공원 안에 거주할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이 오래전부터 숲에서만 살아온 것은 아니겠지만, 굳이 과거의 이야기를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영화의 일차적인 화두는 공동체를 최대한 벗어난, 탈 속세의 삶이 그 자체로 가능하냐는 물음일 것이다.


<흔적 없는 삶> 스틸컷


그렇다면 그다음 질문은, 딸 '톰'은 아빠를 따라 계속해서 그러한 삶의 양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에 관한 것이겠다. 적어도 그녀가 아빠와 숲에서 사는 것 자체를 싫어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들의 거주 형태는 아빠의 의도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유년기의 생활 모습과 성장 과정은 대부분 부모의 영향 아래 놓여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자녀가 부모의 삶의 방식까지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톰'과 아빠'가 만약 아무런 지장 없이 수십 년을 숲에서 계속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톰'이 경험하는 세상의 크기는 그렇다면 그 숲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은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나름의 프로토콜 같은 것을 만들어둔 것으로 보이고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는 등 여러 활동을 공동으로 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빠가 딸의 보호자일 테지만, '톰'은 그저 보호의 대상으로만 있지는 않는다. 사실상 파트너로서 공생하는 것이다.


중반 이후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되었을 때 '톰'의 반응과 행동을 보면 그녀는 아빠와의 일상 외에도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향한 호기심과 열린 마음을 가진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영화의 기반이 된 원작을 읽지 못한 탓에 작품이 '톰'과 아빠의 이야기를 숲에서 시작하게 된 의도와 그러한 환경을 통해 무엇을 결국 탐구하려 했는지에 관한 짐작은 그 범위가 다소 한정적일 수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가족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의지를 <흔적 없는 삶>은 직접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나 사려 깊게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후반부에 나타나는 '톰'의 어떤 결심과 그에 따른 행동은, 사실상 그녀와 아빠의 관계 양상을 뒤바꾼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흔적'이란, 조금 다른 말로는 '그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은, 언젠가 자신을 낳아 길러준 부모로부터 독립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부모가 살아온 모습을 그대로 따라 살지 않는다. 이전 세대와는 같지 않은 환경에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며 자라기 때문이다. 이제 '톰'에게는 어떤 새로운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 조금 더 강인하고 꿋꿋한, 생의 의지와 담대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내일을 영화가 끝나고도 응원하게 된다. (★ 8/10점.)



<흔적 없는 삶> 해외 포스터

<흔적 없는 삶>(Leave No Trace, 2018), 데브라 그래닉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새로운 물결'(New Currents) 부문 상영작.

(미국, 2018년, 109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토마신 맥켄지, 벤 포스터 등.



*<흔적 없는 삶> 해외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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