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새 정규 앨범의 작업 과정을 담으려고 했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7)는 촬영 중 류이치 사카모토가 인후암 진단을 받으면서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다큐멘터리여서만 가능할 수 있는 일. 영화의 시선은 삶의 전환점을 또다시 맞이한 그의 일상과, 그의 눈과 귀가 향하는 곳곳에 함께 머물며 따른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코다'(Coda)는, '에필로그'(Epilogue)와 비슷한 말로 꼬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작품의 부제는, 그래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활동 중단 이후 '시작'된 새 악장으로서의 삶 전체를 인상적으로 대변한다. 여러 장르의 악기와 소리를 자유롭게 다루며 늘 '영원한 자연의 소리'를 탐구해왔다는 그는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수상으로 영화음악 커리어의 정상을 달리면서도 늘 영화에 그치지 않고 음악과 세상의 관계와 그 사이의 접점을 모색하며 그에 따른 결과물을 끊임없이 선보인다. 작업실에서 몇 가지 즉흥적인 소리를 만들며 혼자서 그 안에 골몰하고는 "이런 소리 좋죠?"라며 취재진에게 천진하게 질문을 하거나 스스로 감탄사를 연발하는 모습들. 쓰나미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버텨낸 피아노의 결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다른 피아노와는 같지 않을) 소리를 생각하는 모습, 후쿠시마 원전 사태 등 환경 문제를 향해 꾸준히, 적극적으로 내는 목소리(동시에 그는 자신의 음악이 정치적으로 쓰이는 것은 경계한다). 영화를 풍요롭게 채우는 건 이렇듯 그의 음악 자체가 아니라 삶의 크고 작은 음성과 사색들이다.
영화음악 애호가라면 그 존재 자체로 선물인 장면들도 다수 있다. <마지막 황제>(1987)와 <마지막 사랑>(1990), 그리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에서 그가 선보인 메인 테마 곡들은 영화의 풋티지와 함께 삽입돼 음악이 영화와 어떻게 조화가 되는지 헤아린다. 영화의 타이틀이 나오기 전,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를 공연하는 장면에서는 피아노의 첫 음이 그의 손끝에 닿는 순간 이미 탄성을 지르게 된다. 물론,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에서 데이빗 보위와 함께 연기한 신 등 배우로 종종 활약했던 그의 다른 얼굴들도 빼놓을 수 없다.
흔한 전기적 구성으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 아니라,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40년을 한 분야에 매진해 온 한 장인이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예술적 영감은 어떻게 얻는지, 그가 사소한 소리나 공간, 사물에 주목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사려 깊은 시선으로, 알맞은 거리를 지키며 고요히 담은 기록이다. 이는 평소 그의 음악에 어느 정도의 관심이나 인지가 있어야 작품을 조금 더 풍부히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향유할 줄 알거나 그럴 준비가 된 관객이거나.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질병을 극복하고 화려하게 현업 무대에 복귀하는 아티스트의 빛나는 순간을 그리려 하지 않으며, 인상적인 편집이나 자잘한 기교로 관객을 잡아끌려 하지도 않으며, 애써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의도도 애초 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그의 많지 않은 사소한 언어들과, 숲을 거니는 발소리, 비 오는 창밖을 보다 양동이를 뒤집어쓴 채 빗소리를 느끼는 일,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에 음표들을 적어내려가는 연필 쥔 손, 여러 종류의 알약들을 하나씩 삼키는 그의 표정,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을 뿐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자신이 바라보고 느끼는 세상의 시공간을 소리로 표현하던 그는 무심히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고 이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저 매 순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업을 늘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암 진단 이전에 구상했던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새롭게 (앨범 작업을) 시작할 줄도 알고, 인간의 악기가 내는 소리가 자연이 아닌 인공의 것이라 여길 줄도 알며,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가능성을 찾아내려 하는 사람. 어떤 장면에서 그는 자신의 음악이 아니라 영화 속 내레이션의 대목 하나를 떠올린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사랑> 중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고 여긴다"라는, 폴 보울스의 이야기. 한국 영화로는 처음 작업했던 <남한산성>(2017)과 관련한 인터뷰를 문득 살피다 보니, 이 말이 눈에 띈다. "음악이 영화의 빈 공간을 모두 채워버리는 최근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숨 쉴 공간이 더 필요하고, 영화 자체에서 얻는 감흥을 즐길 필요가 있습니다."([매거진 M]과의 서면 인터뷰 중, 2017년 10월)
1952년생인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제 60대 중반의 나이를 지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취재진에게 하는 말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재능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영감을 발견하고 조율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돌이키며,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빠르게 많이 감각하고, 짧게 소비하며, 생의 감각을 그렇게 흘려버리지는 않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 8/10점.)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국내 메인 포스터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 스티븐 쉬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