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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21. 2018

내 힘만으론 어렵겠지만, 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중생A>(2018), 이경섭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기대감을 될 수 있는 한 낮추게 만드는, 편견 아닌 편견을 품게 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전자는 한국 영화고, 후자는 웹툰 원작의 영화다. 그러니까 <여중생A>는 내게는 둘 모두 해당한다. 예고편을 봤고 시놉시스를 읽었음에도 이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고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도 얼마간 심드렁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씩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한 대목은 '원더링 월드'라는, '미래'(김환희)가 즐겨 하는 온라인 게임 속 세계가 그려질 때부터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미래'가 쓰는 컴퓨터가 '윈도 98' 운영체제를 구동하고 있었다는 점과 작 중 배경이 2005년이라는 데에서 그 미소가 비롯했다.


<여중생A> 스틸컷


조금 더, 조금 더 정확히 느낀 감상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여중생A>가 단지 인기 있는 원작에 기댄 안이한 기획이 아니라고 느낀 대목이 바로 거기서부터 였다는 점이다. '미래'가 게임을 좋아하는 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영화 속 초반부 몇 개의 신만으로도 미루어 그녀는 현실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다는 점을 헤아릴 수 있다. '미래'는 단지 게임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게임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게임 자체의 이야기를 아끼며, 이야기들 안팎으로 생겨나는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인물이다. 그런데 '다크'라는 아이디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더링 월드'가 돌연 서비스 종료를 선언하고 대부분의 길드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여중생A>는 원작이 있음에도 시나리오가 아주 치밀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크게(혹은 단순히) '미래'의 학교생활과 학교 밖 생활 / '재희'(김준면)와의 관계 / '태양'(유재상) 및 '백합'(정다빈)과의 관계 / '미래'가 쓰는 소설 속 이야기 정도로 틀을 나눈다면, 서로를 오가는 톤도 일관되지 않고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도 원작을 무리하게 축약하거나 생략한 기색이 역력하다. 작품이 의도한 바에 따른 것이겠지만 '미래'와 부모의 관계도 '미래'의 현실을 어둡게 보이려는 장치일 뿐이고 한 사람의 삶과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려 하기보다 갈등에 필요한 설정들을 취사선택하여 간추렸다는 인상을 준다.


<여중생A> 스틸컷


그러나 대사 처리나 극의 흐름과 같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부분 대신 이 이야기가 결국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이야기였을지를 헤아리려 한다면 <여중생A>라는 작품을 호의적으로 볼 마음이 충분히 생긴다. 먼저, '미래'가 쓰는 소설. '미래'의 내레이션을 통해 일부 내용이 영화에 덧입혀지는 이 소설은 그녀의 내면세계를 투영할 뿐 아니라 영화를 통해 그녀가 겪게 되는 일들로 인한 캐릭터의 변화와 성장을 대변한다. 현실도피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던 이 이야기는 타인의 존재에 맹목적으로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를 진정으로 헤아리고 그 존재를 소중히 여기려는 진심이 만들어내는 힘으로 채워진다.


적어도 영화에서 제시되는 몇 가지의 상황과 장면을 제외하면 '미래'의 삶에는 지금껏 무슨 일이 있었을지 나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이야기에선 아무도 다치지 않아"라고 '백합'에게 힘주어 말하는 그녀의 말을 통해 '미래'는 스스로가 다쳐본 일이 많거나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일을 적지 않게 겪었을 것이라고 헤아릴 수 있다. 자신이 쓰는 소설의 맺음을 아직 분명히 정하지 못했고 고단한 삶에 잠시 위로를 주던 게임은 서비스 종료를 하게 된 그 무렵, 길드 멤버 '희나'가 귓속말로 알려준 어딘가에 가자 그곳에는 몸보다 큰 인형을 뒤집어쓴 누군가가 있었다. 인형 속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와 만나는 시간 동안 '미래'는 다시 조금은 웃을 수 있게 된다.


<여중생A> 스틸컷


이제야 작품의 이름을 살필 차례다. 'A'라는 말은 두 가지에서 나온다. 하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잠시 등장하는 어느 신문 기사 속 '여중생 A'의 'A'이다. 다른 하나는, 분명히 전자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는 다른 하나는 '미래'가 쓰는 이야기 속 누군가의 호명이다. 내레이션으로 제시되며 그 대상을 뚜렷하게 적시하지 않는 이 'A'가 정확히 누굴 가리키는지는 영화 속에서 확인하면 될 일이지만, 타인을 이름으로 호명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관계를 만드는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그를 친하게 가까이하는 이가 없을지라도, '미래'가 만드는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게임 속에서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보다 그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와 나누는 이야기만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만으로 그 존재에는 어떤 힘이 생긴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자체라기보다는 때로는 이야기를 매개로 해서만 만날 수 있는 관계라는 생각"에 동의하자면, (유희경 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평론가 김나영의 해설 중, 115쪽, 문학과지성사, 2018) <여중생A>에서 '미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은 그 시작이 '원더링 월드'이거나 '미래'가 쓰는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흔히 (내 기준) 매력적인 인물이라 여기는 영화 속 캐릭터는,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이 있을 때 그것에 무기력하게 수긍하지 않고 "과연 이 세계가 최선일까" 싶은 마음으로 그 세계를 더 깊이 탐구하는 인물이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 치자면 "이 결말이 최선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 결말 뿐 아니라 과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몇 번이고 고쳐 쓰는 사람이다. <여중생A>의 '미래'는 그런 사람이다. 계속 쓰는 사람. 고쳐 쓰는 사람. 이 세상에 필요한 인물은 그런 인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고쳐 써볼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미래'가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 학교 내에서 '백합'에게도 찾아온 것을 목격하는 상황. 이는 <우리들>(2016, 윤가은)에서 '선'과 '지아'의 관계, <목소리의 형태>(2016, 야마다 나오코)에서 '쇼야'와 '쇼코'의 관계와 유사하다. 같거나 비슷한 어떤 일을 두 사람이 겪게 되면, 거기에는 그저 "그렇겠구나" 정도의 피상적인 이입이 아니라 좀 더 친밀하고 진실된 헤아림이 가능해진다.


모든 당신은 슬프다, 라고 쓰고 나니 그 당신들이 주렁주렁 열린다
내가 만난 당신들 한라봉처럼 배꼽이 나왔다 배꼽 때문에 웃다가 결국 배꼽 때문에 울었다

어떤 날은 눈이 퉁퉁 부어서 나갈 수 없었는데 생감자를 썰어 붙여도 부은 눈은 가라앉지 않았다
주전자 꼭지를 닮은 배꼽, 툭 튀어나왔으므로 툭하면 아팠다

누가 어떻게 볼까를 왜,

배꼽이 내장한 고감도의 전류, 건드리기도 전에 비명이 나오는 건 이미 닿아본 때문이겠지만
저마다 아파 다른 아픔도 아파
아픈 자리에선 나비가 꽃이 도마뱀이 나오곤 했다

나도 힘이 든다고 말하려다 만다
동족끼리 아플 때는 서로 어떻게 부비나

게이가 게이를 알아보듯 내 배꼽이 당신을 알아본 건데

모든 당신은 슬프다, 라고 쓰고 나니 정말 슬픈 일은 여기까지 무사히 배꼽도 없이, 아픔도 모를 당신과 당신일 것이어서

이규리, '봉봉 한라봉' 전문
문학동네 시인선 054,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중에서


<여중생A> 스틸컷


전문을 가져왔지만 힘주어 쓰고 싶은 구절은 '저마다 아파 다른 아픔도 아파'라는 대목이다. 타인과의 갈등과 폭력은 많은 경우 나에게 어떤 대상이 좋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대상이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다름을 가능한 만큼 내 것처럼 여기고자 하는 노력이 '다치지 않는 관계'를 만든다. 적어도 '미래'는 원래부터 그런 노력을 아는 사람이었겠지만,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미래'와 '태양', '재희', '백합', '노란'의 관계는, 그리하여 만들어진 <여중생A>는, 이 사회에서 타인과의 공존이 희망적인 형태로 가능할 수 있는지에 관한 탐구에서 출발했으리라 여겨본다. 중요한 순간 판타지의 힘을 잠시 끌어오는 것은, 어쩌면 그저 어느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현실에서 그런 일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일 수 있겠지만. "슬플 땐 울어도 괜찮아"라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 "너도 아팠겠구나"라고 헤아려줄 수 있는 사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타인의 이름을 마치 내 것처럼 다정히 호명해주는 그 순간, 혼자여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가능해지곤 하니까. 누군가의 온기를 기다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모든 A들이, 이제는 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 7/10점.)



<여중생A> 메인 포스터

<여중생A>(2018), 이경섭

2018년 6월 20일 개봉, 114분, 12세 관람가.


출연: 김환희, 김준면, 유재상, 정다빈, 정다은, 이종혁, 김현빈 등.


제작: 영화사 울림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여중생A> 스틸컷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 (2018.06.19 메가박스 코엑스)

*<여중생A> 메인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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