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2018), 민규동
"일반적으로 대량 학살이나 집단 성폭력 같은 트라우마(끔찍한 정신적 외상)의 생존자들은, 고통을 겪은 자신과 고통을 말하는 자기 사이에서 분열한다. 자신의 고통을 믿지 못하는 청자(聽者)를 위해 자기 경험을 조절하거나 의도적으로 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 자체도 상처지만,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상처다. 그래서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commitment)하는 실천인 것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교양인, 2013.)
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폭력을 겪은 사람에게, 살아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상처가 되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의 연장이다. 문제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 되며, 자신의 고통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 여기게 되면 그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에게서까지 부정당하게 되며 “내가 내 아닌 척 하고 살 수는 없다 아이가”라는 말을 그는 하지 못한다.
영화 <허스토리>는 그래서 오직 정면을 본다. 고통으로 심신이 황폐해진 사람에게 '그 고통이 이런 모습이었나요?'라며 그가 이미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일을 보여주려는 마음을 처음부터 먹지 않았다. 이는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는 피해자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곧 피해임을 아는 연출자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씨네21] 1160호, 민규동 감독의 인터뷰 - '위안부 영화가 아니라 동시대성의 여성영화여야 했다' 중에서) 장면으로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데에 드는 시간 정도는 아낄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러나 장면을 공들여 구성하는 데 담기는 정성은 당사자의 이야기를 정면에서 듣기 위해 필요한 정성에는 어쩌면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을, <허스토리>는 하게 만든다.
오직 이야기 되는 이야기,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를 이어서 낳는 이야기,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 하게 만드는 이야기, 들로 구성된 영화이므로 기억할 만한 일련의 대사들을 통해 영화 이야길 대신해야겠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맞다 맞다" 하며 가만히 곁에 있어줄 때 꺼내진다. "당신도 피해자"였다는 걸 깨달을 때 그 당신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그게 답니다." 라는 말이 과연 어떻게 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말인지 헤아릴 때 다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을 수 있게 된다.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라며 승패 자체로부터 거리를 둘 줄 알 때에 이야기의 의미는 더 큰 힘을 갖는다.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이야기 하지 않는 순간에도 화자와 청자는 고요하지만 단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아픔을 겪은 것이 나만이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이 위로가 되려면, 타인의 아픔이 내 것보다 큰 게 아니라 그들 각자가 무엇과도 환원되거나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두의 것에 관하여 하나하나 들어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은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것이며, "할머니 예뻐요"라고 상대를 웃음 짓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빨리 끝내고 국시나 먹으러 가자"며 해보지 않았던 말을 선뜻 꺼내 보는 것이다.
<허스토리>는 "과정도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화자가 말을 더 꺼내기 힘들어할 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라며 걸음을 멈출 줄 알지만 이는 이야기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이야기가 문제없이 잘 쌓였는지 거듭 숙고하고 검열하는 또 하나의 과정에 해당한다. 이 비극은 과연 어떤 비극이었나를 정의내리기에 앞서, 오직 그것들을 고스란히 겪고 감내해온 자들의 끝나지 않은 삶에서 진실한 용기를 이끌어내는 일. 아픔의 곁에 여섯 해든 스물세 번이든 언제까지나 머물러주는 일. 이런 일을 영화가 해내는 것은 어렵다고 믿는데, <허스토리>가 해내는 일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흘러나오는 자우림의 노래 제목은 '영원히 영원히'다. 이야기는 단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시작된다. 그때 비로소, '이기는 것'과 '지지 않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픔의 아픔 곁에서 주름지고 흉터 난 손을 가만히 쥐어줄 때, 고난의 삶은 용기의 이야기가 되며 그 이야기는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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