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선생님과 선배님들
글이나 영화 등 누군가의 세계관이 투영된 대상을 통해 그 사람의 세계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을 이유란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의 글을 읽으며 그 사람을 선생님이라 여기고, 마음의 선배라고 여기게 되는 일을 나는 많이 겪어왔고 또 겪고 있다.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들도 내게는 그런 의미가 되었는데, <동주>와 <박열>에 이어 마침내 <변산>을 통해서는 그것에 거의 확신과 같은 것을 품게 되었다.
다시 본 영화는 처음 이상 좋았고, 이 영화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변함없으리라 믿을 만한 신뢰가 생겼다. 오늘의 메가토크는 그동안 다녀본 것과는 확연히 다른, 참가자들의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가 듬뿍 느껴졌는데 그것은 존재만으로 현장을 빛나게 해주는 것이었다. 폰으로 제대로 담기조차 힘들 만큼 먼 거리에서 목소리만으로 접해야 했지만 이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현장이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박정민의 산문집 [쓸 만한 인간]에는 <동주>를 촬영하면서 나눴던 이준익 감독님과의 대화도 언급된다. "영화는 네 것 내 것이 없다. 이건 내 거네, 저건 네 거네 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영화는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가운데 두고 모두가 같이 보고 있으면 영화는 늘 그 자리에 있다." (142쪽, 상상출판, 2016.) 이런 태도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협업하는 타인들을 배려하고 내세워줄 때 자연스럽게 발휘된다. 감독님은 연출 데뷔 때부터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여겼다며 언제나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현장을 뛰는 스태프와 배우들이 빛나고 그것이 좋은 과정이 되어 좋은 결과물로 이어졌다는 것을 그의 영화를 통해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지하철역에서 기자님을 만났다. 전 전 직장에서 몇 차례의 GV를 통해 연락을 나누고 인사드렸지만 그 이후로 너무 오랜만에 봬서 죄송스러울 정도였는데, 그리 오래지 않았던 것처럼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침 내 한 손에 들려 있던 책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덕분에 자연스럽게 [밤이 선생이다] 이야기도 오갔다. 돌아보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내 존재에 과분하다 느껴왔던 적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이 업무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기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대화를 위해 평소에 타지 않는 9호선 급행을 타며 오는 길도 기분 좋은 자극으로 겸허해지는 시간이었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말씀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
늘 세상의 다양한 이면을 고루 바라보면서 자신만의 정념을 갖되, 그것을 직접 말로써 표현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정신이 담긴 창작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빛낼 줄 아는 사람. 자신의 공적보다 타인의 존재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쉽게 져버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 제대로 만나 친해져 본 적도 없으면서 감히 내가 '선생님'이라 칭하게 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다. 황현산 교수님의 책을 읽었고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참석했으며 업계 선배 기자님과 귀가길을 동행했으니 이보다 '밤이 선생인' 시간이 또 있을 수 있었을까.
이제 유월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칠월의 세계도 한 번 믿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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