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ug 08. 2018

시대의 어른이 곁을 떠나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비보를 듣고

책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173쪽에서, 난다, 2018


선생의 글은 특정 페이지나 특정 문장을 굳이 강조하는 게 무용할 만큼, 그 전체가 시대와 세상을 꿰뚫는다. 이 사회를 먼저 치열하게 살아온 인물의 비보를 접할 때마다, 조금 더 오래 거기 계셔주었으면 하는, 여전히 살아있는 선생'들'의 글을 더 찾아 읽게 된다. 이 분의 책을 종종 언급했지만, 그중 한 분의 '신간'을 끼고 지낼 수 있다는 건 독자로서 행복한 일이다. 번역자로서, 불문학자로서, 비평가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어른으로써. 꼭 강의나 말씀을 직접 듣고 책에 싸인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요즘 이 책을 늘 들고 다니고 있다. 이런 혜안과 통찰을 늘 존경하고 배우고 싶어 하면서. 미약한 독자의 사소한 바람이다. 이 책의 존재가 고마운 여름이다. 밤에는 [밤이 선생이다]를 다시 꺼내야지. 책은 영화만큼 잘 추천할 줄은 모르지만, 황현산 선생의 글은 나에게 그 어떤 주석도 부연도 필요 없이, 그냥 "읽어보세요" 하고 언제나 꺼낼 수 있는 존재다.

불과 2주 정도 전에 이런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치 나의 혹은 내 소중한 지인이나 가족의 아픔처럼 아프게 다가왔고, 손에 든 신간을 읽으며 문장 하나를 넘길 때마다 쾌유를 기대하곤 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병상에서 일어나셔서는, 계속해서 글을 쓰시고 또 책 한 권을 더 내시고 나는 서점에서 그 신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손에 받아 드는, 그런 날의 도래를 생각했으며 출간 기념행사나 강연 등에 기필코 참석해 "전부터 선생님 글을 좋아했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하며 한가득 들고 간 책에 싸인을 받는, 그런 모습도 상상하곤 했다.


[어린 왕자]의 번역본(열린책들, 2015)을 출간하셨을 때, 그는 "소설은 문체로 마음을 움직인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자기가 길들인 것만 알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옳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직 저자 생텍쥐페리의 진솔하고 열정적인 문체만이 이 말의 진실성을 믿게 하고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라고 썼다. 확고하시되 언제나 겸손한 분이었지만, 나는 황현산 선생의 글 역시도 자신이 번역한 생텍쥐페리의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진실성을 믿게 하고 나아가 감동하게 하는 글. 특정 문장, 특정 문단이 아니라 그의 글은 매번, 그 글 전체를 가져다 인용하고 싶을 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문학의 힘과 가치를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것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지 모를 누군가가 자신의 언어로 남긴 흔적에, 마치 나의 언어인 것처럼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아가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을, 문자 너머의 삶을 동경하고 그 존재들이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와 닿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 나는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늘 그렇게 느꼈다. 십수 년 전에 쓰신 글도, 최근에 쓰신 글도, 늘 변함없이 이 세상을 성찰하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제가 무지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다."(229쪽, 난다, 2018) 단 한 번도 만나 뵌 적 없는 분의 글을 읽으며 그 사람의 글을 좋아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나마 '선생님'이라 감히 칭해볼 수 있어 행복했다. 다만 선생의 글을 모두 헤아리기에 나는 무지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읽을 것이다.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 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169쪽에서)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 앞에 우리를 바치는 것도 하나의 축제다. 몸을 위한 음식도 정신을 위한 음식도 겉도는 자들에게는 축제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같은 책, 127쪽에서)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밤이 선생이다], 5쪽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칭찬에 관하여, 다만 나를 웃게 하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