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ug 08. 2018

반드시 삶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언어들의 발화(發火)

영화 <쓰리 빌보드>(2017) 다시보기

*영화 <쓰리 빌보드>의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란 이름은 에빙 마을 사람들에게 그다지 유의미하게 기억된 이름이 아니었다. 옥외 광고판에 문구를 새기기 위해 찾아간 광고사 직원이 “아, 당신이 안젤라 헤이스의 엄마군요”라며, 문구를 확인하고 나서야 ‘밀드레드’가 누구인지 알아본다는 건 적어도 죽은 ‘안젤라’에 비해 ‘밀드레드’라는 이름은 이 작은 마을, 에빙 사람들에게 거의 잊힌 이름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고판에 세 개의 문장, ‘죽어가면서 강간당했다’, ‘그런데 아직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건가, 윌러비 서장?’을 게재하고 난 후에는 모두가 ‘밀드레드 헤이스’를 알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잊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던, 그 이름을 다시 기억해낸 것이다. 일차적인 반응은 평판이 좋고 높은 신뢰를 얻고 있는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향한 동정과 옹호다. 본편에서는 삭제됐지만 ‘눈 이상한 여인’이 길 가던 ‘밀드레드’에게 손가락질하며 광고를 내리라 소리치는 장면, ‘뚱뚱한 치과의사’가 ‘밀드레드’의 이를 뽑기 전 ‘윌러비’ 서장을 두둔하는 장면 등은 사람들의 행동보다 그들의 입에서 발화(發話)되는 말에 집중하게 한다. 옥외 광고에 적힌 문구 역시 7개월을 참고 견디며 쌓아온 말들을 마침내 세상에 드러낸 ‘밀드레드’의 ‘발화’인 것처럼. 술집에서의 ‘딕슨’(샘 록웰)과 ‘마을 난쟁이’(피터 딘클리지),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스) 등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밀드레드’의 기념품 가게에 등장한 이후 술집에서 자신의 범죄담을 늘어놓는 남자(영화의 엔드 크레딧에는 ‘Crop-Haired Guy’라고만 표기돼 있다.)의 이야기. 말이 말을 낳고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닿고 또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모습들이다.


이 ‘발화(發話)’의 절정은 ‘윌러비’가 자살한 이후 공개되는 ‘세 통’의 편지다. 자신의 아내와 ‘밀드레드’, 그리고 ‘딕슨’에게 각각 쓰인 세 편지는 그간 스스로 느껴온 감정과, 수신인에게 전하는 바람 같은 것이 비교적 담담히 쓰여 있지만 이 문자 언어들은 또 다른 ‘발화(發火)’를 만든다. 누군가(‘밀드레드’의 전 남편)가 낸 불로 옥외 광고판이 타버린 후 ‘밀드레드’는 그 응징으로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는데, 이 불은 ‘윌러비’의 편지를 읽는 중이던 ‘딕슨’의 얼굴에 화상(火傷)을 입힌다. 이후 화상을 입은 ‘딕슨’은 술집에서 마찬가지로 얼굴에 화상을 입은 또 다른 남자, 바로 그 남자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DNA를 채집한다.


지금껏 <쓰리 빌보드>는 누군가로부터 나온 말이 다른 이에게로 가서, 그 사람을 어떻게 반응하거나 행동하게 만드는지 지켜보았다. 이는 말하자면 변화(變化)다. 한자 ‘될 화’와 ‘불 화’의 획수가 같은 건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까. ‘밀드레드’는 하필 죽기 전 딸을 본 마지막 순간, 딸의 “걸어가다가 강간이나 당할 거야”라는 말을 똑같이 “그래, 강간이나 당해버려!”라고 맞받은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말은 뱉으면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도 상처가 된다.


표면상 ‘밀드레드’가 주인공이지만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건 ‘딕슨’의 얼굴이다.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온 ‘딕슨’에게, 영화는 병상에 누운 채로 실려가며 천장을 보는, 자신과 같은 병실을 쓰게 된 사람이 자신이 구타한 ‘웰비’임을 알아차리는, 그리고 자신에게 ‘웰비’가 오렌지 주스를 건네는 순간을 지켜보는, 세 차례에 걸친 시점 쇼트를 할애한다. 첫째는 그간의 자신의 구타로 병원에 실려왔을 누군가의 시점이 되어보는 것, 둘째는 자신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지른 행동을 성찰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사람이 갖고 있을 최소한의 선의(善意)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자 ‘뜻 의’에 들어간 ‘마음 심’ 역시 ‘될 화’와 그 획수가 같다. 이 모든 이야기를 감히 이렇게 요약해야겠다. 영화 <쓰리 빌보드>는, 서로에게 상처 낸 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되어보는 영화다. 아파보기 전엔 아픔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