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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5. 2018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 생면부지의 이야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2018)

종이책을 구입할 때, 종종 빠뜨리는 덕에 모든 책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책에 내 이름을 적어두곤 한다. 정확하게는, 책을 구입한 날짜와 장소, 그리고 내 이름의 이니셜을 적는다. (ex. 2018.08.12 / 교보문고 합정 / kdj) 언젠가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 처음에는, 그저 '내 책' 혹은 '내가 읽을 책'임을 스스로 알리는 표식 같은 것이었지만 나아가 사물에도 어떤 생명이 깃드는지도 모른다는 믿음에서 그 습관이 지속되기에 이르렀다. 가끔 중고로 책을 팔 일이 생기면 (주로 알라딘) 그것 때문에 품질등급 하나가 내려가기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책에 흔적을 남겼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 주된 이유는 자신의 물건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어떤 계기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살면서 한 번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혹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한 관심사, 분야, 공감, 그런 것들로 엮이고 이어지는 순간들을 나는 많이 경험했고 느꼈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스틸컷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스틸컷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2018)의 주인공 '줄리엣'(릴리 제임스)도 그런 사람이다. 작가이기 이전에,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 세상 모든 이야기를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 영화의 대사 하나면 충분할 것이다.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네 삶이 다를지라도 책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준다는 걸요." 런던에 사는 '줄리엣'과 작은 섬 '건지'의 사람들을 이어준 건 책이었고, 그들의 대화와 그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또 다른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든 건 편지였다. 태연하게 오스틴과 브론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낭독하고 이야기 나누던 '문학회' 사람들이 실은 남모를 사연과 계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바로 그 책과 편지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작품의 제목에 이끌렸고 릴리 제임스 덕분에 보게 됐는데 수확이 있었다. 서간체 형식으로 된 원작 소설을 어서 읽어야겠다. 반 세기도 더 지난 시대의 생활 모습, 타자기 소리, 정갈한 필기체, 무언가를 종이에 쓰기 직전의 그 망설임과, 자신이 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처음 읽힐 때의 떨림. 작품 자체는 아주 잘 만들었다기보다 오히려 적당하고 평범한 정도였지만, 이 영화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그것들을 꽤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까, <건지 감자껌질파이 북클럽>은 책을 사랑하는 모두를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책의 어느 한 문장, 어느 이야기 하나에 마음이 울었던 적 있다면. (★ 7/10점.)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과 <해리포터와 불의 잔>(2005) 등을 연출한 마이크 뉴웰의 작품으로, 유럽 일부 국가의 극장에서만 제한적으로 개봉했으며 국내에서는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는 아니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해외 포스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The Geu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Society, 2018), 마이크 뉴웰

2018년 4월 20일 영국 개봉(Limited), 123분, 15세 관람가.


출연: 릴리 제임스, 미힐 하위스만, 제시카 브라운 핀들레이, 페네로프 윌튼 등.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예고편: (링크)

*케네스 브래너가 한때 감독직을 맡을 뻔했고, 주인공 역에는 레베카 퍼거슨, 케이트 윈슬렛, 로자먼드 파이크 등이 거쳐갔다. 몇몇 촬영지는 TV 시리즈 [다운튼 애비](2010-2015)의 그곳과 동일하고, 주요 배우들 역시 해당 시리즈에 출연한 바 있다.

*영국 해협에 있는 건지 섬은 2차 대전 당시 영국 영토 중 유일하게 독일에 점령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2008년 출간된 메리 앤 셰퍼 & 애니 배로스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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