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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6. 2018

얼굴이 만드는 이미지, 언어가 만드는 이야기

<공작>(2018), 윤종빈

노골적이지 않은 유머, 디테일에 강한 캐릭터, 기술적인 완성도와 장르적 쾌감까지, <군도: 민란의 시대>(2014)를 꽤 흥미롭게 봤던 터라 <공작>(2018) 역시 보기 전에 별 다른 우려나 의심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보고 나서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종빈 감독의 전작보다는 <강철비>(2017, 양우석)를 더 뚜렷하게 생각나게 했다.


영화 <공작> 스틸컷
영화 <공작> 스틸컷

'박석영'이 북한 당국자들의 눈에 들고자 해외 사업가로 위장하는 과정은 비교적 명료하고 짧게 다뤄진다. "리 처장입니다"라는 그의 전화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앞서 <강철비> 이야기를 한 건, 정우성과 곽도원이 연기한 두 인물의 관계 설정이 각자 조국을 위한 활동을 하던 도중 서로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공작>의 두 사람과 유사하게 보였기 때문일 뿐이다. 12세 관람가인 것에서도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듯, <공작>은 '첩보 액션' 영화가 아니다. '첩보 드라마'다. 상황적 묘사로 등장하는 포격은 있지만 극 중 주요 인물들 간에 총격전이나 칼부림 같은 건 벌어지지 않는다.


영화 <공작> 스틸컷

오직 말로 승부하는 영화다. 그런데 작품의 모티브가 된 '흑금성'에 대해서는 모르더라도, 우리는 1997년 12월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었는지와 이후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공작>이 주는 긴장감은 실제 일어난 일을 뛰어넘는다. 감독의 전작보다 눈에 띄게 많은 인물의 클로즈업, 그리고 여전한 '말발', 즉 상당수의 중요도 높은 대사들과 그에 따른 상황 설명. 행동하기도 전에 서로가 주고받는 말들과 그들의 표정은 이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 같은 영화들을 연상케 할 만큼 몰입도가 좋다. 윤종빈 감독의 전작들에서 얼굴을 이미 비춘 이들과 처음 합류한 황정민, 주지훈 등 배우들의 합도 뛰어나다. 얼굴이 만드는 이미지, 언어가 만드는 이야기. 두려움 없이, 말로서 말로써 오직 전진하는 영화다. 처음 '박석영'을 만났을 때 '리명운'이 하는 말처럼 말이다. 탈선하거나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전진하는 영화를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것보다 영화에서 중점을 두는 건 급변하는 양국 관계 속에서 '박석영'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리명운' 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주변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일 것이다. 안기부 조직 내부의 변화와 총선 및 대선에 따른 남한의 정세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북한의 반응들까지 '박석영'은 베이징에서나 평양에서나 서울에서나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최 실장'(조진웅)으로부터 끊임없이 '조직'과 '국가'를 위한 임무와 지령을 하달받지만 정작 '박석영'은 남북 모두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그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영화 <공작> 스틸컷


본격적인 '흑금성' 작전을 수행하기 앞서 '박석영'에게 '최 실장'은 말했다. 유사시, 즉 그의 정체가 발각될 시 국가와 정부는 '박석영'의 공작 행위를 부인할 것이며 그는 상황에 따라 스스로 판단을 내려 행동해야만 할 것. 그리고 '박석영'은 그 순간을 맞이하자, 정말로 자신이 옳다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 가치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후반에 이르러 '5년 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영화 속 앞선 일들과 그 톤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공작>은 첩보 영화의 틀에 있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총성 없이도 긴장하게 만들고, 아는 역사적 배경도 다시 생각하게 만들며, 무엇보다 '박석영'과 '리명운' 사이에 만들어지는 기류는 여러 차례 언급되는 사자성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어떤 에너지를 형성한다. 주인공에게는 끊임없이 고뇌하게 하고 질문을 던지지만 영화 스스로는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작품을 볼 때, 그 에너지는 관객의 것이 된다. 정말로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영화 밖 남북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떠나, 영화 <공작>은 '박석영'이 매 순간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스크린 바깥의 에너지로 고스란히 환원시킨다. (★ 8/10점.)



영화 <공작> 메인 포스터

<공작>(2018), 윤종빈

2018년 8월 8일 개봉, 137분, 12세 관람가.


출연: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주지훈, 김홍파, 정소리, 기주봉, 김응수, 남문철, 최병모, 김인우, 정기섭, 김소진, 최정인 등.


제작: (주)사나이픽처스, (주)영화사 월광

배급: CJ엔터테인먼트


*<공작> 메인 예고편: (링크)



*여담으로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영화 자체에 대한 리뷰나 감상 외적인 내용이므로, 굳이 더 읽지는 않아도 좋다.) <공작>은 북한을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았다. 굳이 '리명운'(이성민)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거리에 나앉아 죽어가는 적나라하면서도 오래, 카메라에 힘을 실어가며 보여줬고, (극영화로서 당연하게도) 픽션을 가미했다 한들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게다가 후반부 전개와 그 결말 역시도 '박석영'(황정민)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면서 그와 '리명운'의 관계에 힘을 싣고 있지 여타의 것들은 그저 상황 묘사 정도에 머무른다. 왜 이걸 굳이 강조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나 상황, 사건 묘사는, 그 자체로 그 영화가 사안을 바라보는 태도를 설명하지 않는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물이나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그 사실이 해당 영화의 연출자나 작가가 그것(폭력)에 동조하거나 그것을 미화하는 게 아니듯이. (미화, 좌편향 같은 단어를 개입시키기 전에, 단면이 아니라 전체의 맥락부터 살펴야 할 일이다.)


나는 온라인에서의 일부 자극적이고 이분법적인 이야기들이 전체, 그러니까 오프라인을 포함한 여론 자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만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이들. 그 일부의 가벼운 언어들에서 대체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더 자극적으로, 서로의 '드립력'을 겨루는가 하면 특정한 시대 배경(일제강점기 등)이나 특정한 정치적 사안(남북관계 등)을 다루는 영화에 대해서 유독 극단적이고 단순한 언어 놀림들이 난무한다. 여러모로 온라인상의 '반응'은, 신뢰할 만한 지표가 되지 못한다. 굳이 영화의 선택에 있어 타인의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친구나 지인의 이야기가 훨씬 더 도움이 된다. 포털사이트 평점이나 20자 평, 같은 건 그다지 참고할 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 지 오래다.


*영화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완전히 실제인 것만을 그대로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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