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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4. 2018

술을 마시지 않아도 제주에 취했던, 여정의 기록

제주도라니, 동진아

현대카드 Privia를 통해 항공권을 예매했다.


2018년 8월 24일 금요일



#1


마음만은, 마음만은 '뉴욕이라니 동진아' 시즌 2를 찍고 싶지만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고작 이틀 밤 가지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겠나 싶기도 한 것이지만, <맘마미아!2>에서 무작정 칼로카이리 섬으로 떠났던, 옛날 사람들은 거기서 배를 타고 계속 가면 세상의 끝이 나온다고 믿었다는 이야기를 천진하게 꺼내던 도나 셰리던의 마음을 얼핏 떠올려본다. 제주도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을 간 적 있는 곳이지만, 우도나 성산 일출봉, 섭지코지 같은 지명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 렌트카 타고 해안 도로 다니면서 맘마미아 OST 들어야지.



구글 맵이 알려준 내 숙소의 위치


#2


뉴욕에서 일주일을 지냈던 숙소는 아직도 구글 맵에 'Home'이라 저장돼 있다. 물론 주소도 기억하고 있다. JFK 공항으로 향하기 전, 호스트에게 다시 뉴욕에 오게 되면 반드시 들르겠다고, 심심하고 일상적인 인사를 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적당히 기약 없는 근미래가 있다는 건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생각이 날 때면 브루클린을 찾아 구글 맵에 들어가보곤 한다. 제주도는 그곳보다도 훨씬 짧게 머무르고 거리도 비교할 수 없이 가깝지만 여기도 구글 맵에 위치를 저장했다. 예약을 하고 나서 친절하고 세심한 호스트의 메시지에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에 집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지.


뉴욕에서 지냈던 에어비앤비 숙소는 구글 맵에 여전히 'Home'이라 저장돼 있다.



2018년 9월 3일 월요일


탑승권을 들고, 이제 제주행을 시작해본다.


#3


들고 다니는 에코백 하나와,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가 없어 대충 챙겨 나온 백팩 하나, 그리고 도착하면 날 기다리고 있을 렌트카 하나, 몸을 뉘일 방 하나, 약간의 여비. 많이 경험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탑승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이틀살이의 시작이다.



창가자리를 배정받았다.


#4


14년 전, 수학여행 때의 제주에 대해서는 내게 아무런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나는 풍경과 주변에 영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륙의 소음과 기체의 흔들림에도 마치 비행기를 매일 타는 사람처럼 그저 창밖을 바라봤고, 50분 남짓의 비행시간은 아주 짧게 느껴질 것이었다.


자리에서 읽은 책의 문장 하나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록은 쓰는 이의 마음부터 어루만진다."(안정희,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이야기나무, 2015, 63쪽.) 서울을 벗어나기로 한 건 조금 더 평온하고 느린 곳에서 읽고 쓰며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2박 3일의 여정에서 대단한 글감을 찾거나 무엇인가의 영감을 얻거나 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다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책이 든 파우치만 두고, 나머지 짐은 모두 선반에 올렸다.


머리 위 선반에 올려둔 가방 대신 손에 있는 책을 무릎에 얹어둔 채, 조그만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가끔 모니터에 나오는 고도며 온도 같은 수치로 된 정보들을 흘끔거리기는 했지만, 둥근 사각의 창 하나면 여기가 어딘지 어떤지를 알기엔 충분했다. 구름들의 모양과 크기, 그리고 창유리 너머 어렴풋하게 전해지는 그들의 원근감을 신기한 듯 관찰했다. 책장을 몇 번 더 넘기다 보니, 바깥의 구름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제공받은 종이컵 안의 커피를 그제야 한 모금 넘겼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다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둘은 분명 다른 것임에도, 그 경계는 구름 위에서는 흐릿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고도가 더 낮아져 해수면 위 물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파도와, 큰 배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히 시야에 들어오는 배 한 척, 멀리 까만 점처럼 보이는 다른 배들, 그리고 조금씩 수심이 얕아지고 있음을, 나와 땅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바닷물의 색 변화. 태어나서 제주행 비행기에 처음 몸을 실은 사람처럼 창을 뚫어져라 봤고, 구름들을 지나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양들, 그리고 제주에 가까워졌음을 알게 하는, 바다의 등장.


도착을 알리는 기내 안내방송은 대략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여러분의 곁에 늘 함께하겠습니다. (...) 사랑과 낭만의 섬 제주에서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저도 잘 있고요.
'로맨틱하드보일드'라는 곳에서, 책을 흘끔거리며 피자 하나를 해치웠다.


#5


내비게이션은 종종 내게 경로를 이탈했다 하고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었다. 해안도로 건너편의 바다가 조금씩 햇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차창 너머로 보았고, 산책로를 거니는 사람들도 보았다. 무엇에도 쫓길 것 없었고 어느 것도 약속돼 있지 않았다. 숙소에서부터 20km 남짓을 달려 도착한 곳, 대충 지도 뒤적거리다가 일몰 무렵에 들른 낯선 곳은 비수기 평일 오후에 제격이었다. 친구이거나 직장동료일 것으로 막연히 짐작한 네 명의 낯선 이들을 제외하면 손님은 나 혼자였다. (차만 아니었으면 와인 한 병 클리어 했겠지) 오늘 걸음한 곳들 중에서는 제일 바다 내음 가득했다.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한다. 가면서 결정하고, 길도 가면서 찾는 하루. 아, 도중에 풍경이 너무 예뻐서 차를 세 번인가 멈추고 또 바다를 한참 봤다.


해안도로를 달리다가도, 바다가 예쁘고 하늘이 높으니, 차를 세울 수밖에.



2018년 9월 3일 월요일, 그리고 9월 4일 화요일


운전을 하기 때문에 주류 대신, 커피를 (또) 시켰다.


#6


이만하면 좋은 하루였다 생각했는데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었다. 늦게까지 하는 곳을 찾다 알게 된 LP 바가 좋은 공간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숙소에서 18km 떨어진 곳이었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일은 휴무일이라는 걸 아는 순간,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이곳에 꼭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5분 정도 달려 도착하니 샘 스미스의 곡이 나오고 있었고, 나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곡을 신청했다. 음료는 '마틸다 커피'를 시켰다. 술 대신이라고 생각하니, 하루에만 네 잔째 마시는 커피도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신청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할 때의, 그 탄성.


다른 이들이 신청한 곡들에 감탄하다 보니 자정이 되자 하나 둘 자리를 비운다. 콜드플레이, 마이클 부블레, 김광석, 존 레전드, 글렌 한사드, ... 조금만 더 머물고 싶은데 마실 걸 하나 더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 보니 또 다른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자정 무렵의 사람들에서 이제 자정이 지난 사람들. 그리고 아델과 그린데이와 샘 스미스를 나도 신청했다. 그리고 레몬에이드를 추가했다. 바깥에는 비가 조금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새벽,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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