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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5. 2018

가는 곳마다, 어디든 여기가 되었다

제주도라니, 동진아

2018년 9월 4일 화요일



소박하지만 깨끗했고 아늑하기까지 했던 숙소. 공항 바로 근처였지만 방음도 완벽했다.


#7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라는 점과 공간의 구색에 비해 가격이 꽤 합리적이었던 점 덕에 고르게 된 숙소였다. 신청을 한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예약확정 알림과 함께 호스트의 인사 메시지가 왔다. 주소와 찾아오는 길에 대한 주변 설명과 함께,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의 휴대전화 연락처도 덧붙였다.


체크인 당일이 되자 먼 길 조심히 오시라며 호스트는 내가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할 무렵 한 번 더 메시지를 했다. 제주공항에 내린 후 점심을 먹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휴대전화가 갑자기 고장이 좀 생겨 서비스센터에 다녀와야 한다며, 원래 예정했던 오후 4시가 아니라 언제 도착하든 입실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고 에어컨도 미리 켜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출발 전 도착 예정시간을 알려드렸던 덕분인지 내가 입실한지 10분 정도 후에 호스트가 방문을 두드렸다. 결코 과하지 않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친절. 직접 만든 한라봉차라며 얼음물과 함께 드시라고 내게 쟁반을 건넸다. 침구나 수건 같은 비품에 많이 신경쓰고 있다며 수건도 마음껏 쓰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 하라는 말과 함께.


침대 바로 옆의 창문을 통해서는, 제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것도 가까이에서.


기왕 탕진하는 김에 제대로 하자며 신라스테이 같은, 크게 실망할 일 없고 표준화, 체계화 된 숙소를 이용할까 아주 잠시나마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규모도 작은 이곳에 머물기로 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호스트는 내게, 메시지 할 때는 동진님, 대면할 때는 '선생님'이라 부르셨다. 선생님이라니.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었는데, 과분한 호칭이 죄송스러울 만큼 호사는 그치지 않았다. 오후에 밖에서 커피를 마시다 옷에 조금 흘려 셔츠를 갈아입을 생각으로 숙소에 잠시 들렀다. 주차장이 아주 넓지는 않은 탓에 투숙객들의 외출 시간 등을 염두해 주차할 곳까지 안내해주셨는데, 모두가 불편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호스트의 배려의 마음이 사소한 데서 전해졌다. 바로 근처에 셀프빨래방이 없어 셔츠를 들고 다시 차 시동을 걸려는데, 자신의 세탁기를 쓰라며 통돌이 세탁기를 쓰는 요령까지 안내해주시는 것이었다.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그러나 아주 특별하지만은 않은, 그러나 쉽사리 만나기는 어려운 소중한, 사소한 일상들이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집에 온 것 같았다. 둘째날 아침이 되자 창 너머로 비 온 뒤의 하늘이 바다처럼 보였다.



둘째날, 성산읍에 들렀다가 해안도로를 타고 월정리를 지나 김녕해수욕장 인근까지 차를 몰았다.
풍력발전 시설마저 저렇게 풍경과 어울릴 줄이야.
김녕해수욕장의 해변. 렌터카의 청결을 유지해야 하기도 했고 신발도 하나뿐이라, 모래사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8


정말 짧은 여정이었지만,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혼자 보기엔 너무 과분할 정도로 행복한 풍경들의 연속이었다. 다음엔, 다음의 제주에 있게 된다면, 누군가와 함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비게이션이 뭐라든, 중간에 몇 번이나 차를 세웠는지 모른다. 제일 행복한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차를 멈추고 바다 옆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이었다. 김녕이랑 월정이를 포함해, 여러 바다들과 함께였다. 김포행 비행기는 내일 오전이지만, 차를 일부러 오늘 저녁에 반납했다. 두 번의 낮이 지나고, 이제 저녁을 보내러 가야지.




2018년 9월 4일 화요일, 그리고 9월 5일 수요일



함덕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십오야'라는 술집. 저 투박한 메뉴판 중에 실제로 가능한 메뉴는 그날 그날 다르다. 맥주도 마셨고, 사케도 마셨다. 명란구이와 야끼소바 등과 함께.
낯선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투박하지만 편안한 분위기 덕분에 나는 혼자였지만 우연히 함께였다.


#9


렌트카를 반납한 건 여기를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심야식당 같은 곳. 혼술하러 온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길 늘어놓는 곳. 제주도에 또 오면, 나 여기 또 올게요. 나처럼 내일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 오늘 제주에 온 사람, 여기 사는 사람. 그리고 혼자 운영하는 사장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만 3년을 넘게 알고 지낸 우리는 우연하게도 여기서 처음 만났다. 내가 처음 알았을 때부터, 두 사람은 계속 예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며칠 전에 추천받았던 데를 찾아왔더니, 이토록 무심하고 사랑스럽고 투박한 공간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때문에 제주도에 다시 오고 싶어졌어.




2018년 9월 5일 수요일



체크아웃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본 창밖의 풍경


#10


방문을 나서기 전, 하늘과 바다가 한데 보이는 창밖을 잠시 더 바라봤다. 제주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은 내게 혼자 다니면서 심심하진 않았냐고 물으셨다. 앞서 쓴 다른 글에서는 '다음의 제주에 있게 된다면, 누군가와 함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썼지만, 이 짧은 두 번의 밤이 좋았던 건 전적으로 혼자였기 때문이다. 렌터카 반납 시간과 김포행 비행기 체크인 시간 외에는,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았다. 이미 10만 킬로미터를 넘게 달린 렌터카에 나는 200 킬로미터 남짓을 보탰다. 차와 내비게이션에 마음이라는 게 있다면 자꾸만 멈추고, 또 가라는 길도 안 따르는 차주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차를 타면서 생각했고, 어디로 갈지는 가는 길에 정했다. 추천받았던 장소 중 한 곳에 들렀고, 서점에서는 책을 한 권 샀다. 노래를 들었고 몇 잔의 커피를 마셨다. 그건 서울에서도 하는 일들이었다.


공항으로 가기 전 호스트는 너무 챙겨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집처럼 지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고 했다. 또 방문하게 된다면 같은 곳에 머무르고 싶다고도 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기약은 인사에 도움이 된다. 십오야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우리가 기약 없이 만난 이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가능했다.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마지막 밤은 그런 낯선 사람들로 인해 편안했다. 이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내가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자이기 때문에 온전히 그것들일 수 있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고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에 공간은 어디로든 열려 있었고 만남은 어디에서나 가능했으며, 혼자인 이상 어디에 가나 차분했다.


김포공항에 내리고 나서 받은, 호스트로부터의 메시지. (다음엔 에어비앤비 말고 직접 연락주면 더 싸게 이용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하셨다. 따뜻하고 친절하셨던 분. 고맙습니다.)


돌아오는 기내에서는 김연수의 책을 꺼냈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군가 고민할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 그러니 일단 써보자. 다리가 불탈 때까지는 써보자. 그러고 나서 계속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자.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98쪽.)


첫째날 밤에는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날씨가 완벽히 내 여정을 뒷받침했다.


이 글은 김포공항에서 쓰고 있다. 이제 나는 집으로 가야 한다. 내일은 보러 갈 공연이 있고 모레는 새로 시작하는 모임이 있다. 다시 일을 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새 직장도 구해야 한다. 뉴욕에서의 일주일이든 제주도에서의 이틀이든 그 자체로 내 삶을 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미래의 나를 맞이하게 할 것이다. 어디든 내가 발 붙이고 있는 이곳이 여기일 수 있는 건, 내가 갈 수 있든 없든 간에, 다른 곳들의 존재를 알기 때문이리라. 제주도구나, 가 아니라 제주도라니, 라고 기어코 적어보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주도라니, 동진아.




영화 <쓰리 빌보드>에서의 "가면서 결정하자고"라는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며. 그렇게 차를 타고 다녔다.
스타벅스 성산DT점에서는 서울에서도 할 수 있는 그런 걸 했다. 책 읽고, 필사하고, 그런 것들.
'책방무사'에도 들렀고, 이곳저곳에 차를 멈추고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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