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죄 많은 소녀>(2018)를 보고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에서, 문학동네, 2009, 316쪽.)
내 잘못이다, 라고 말하기보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라고 말하거나, 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서야 '사실은 그때...'라고 겨우 입을 열곤 하는 게, 사람 일이라서. 나는 그래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마땅히 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입을 앙다문 채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숨을 내쉰다. 어떤 경우 그에게는 그저 내가 당신의 말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최선일 수 있으니까. 그냥 최선 말고, 그가 원하는 바로 그 최선.
대략 그런 생각들을 하며 <죄 많은 소녀>를 봤다. 각본과 편집을 겸한 연출의 공이 대단했고 또한 배우의 존재가 단단했다. 다만 중반 이후 펼쳐지는 몇 개의 주변 가지는 조금 덜어냈어도 좋았을 것이라 느꼈고, 여러 경우 음악은 그 효과나 의미와 별개로 다소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영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지 않은 것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라고 느꼈다. 이를테면 너무 어두운 공간인 탓에 보이지 않는 표정, 또 이를테면 뒷모습으로 인해 볼 수 없는 앞모습 같은 것. 사건이 사건에 그치지 않고 서사에 합류할 때, 배우는 영화 언어로서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생명력을 지닌다.
타인의 비극에 사람은 쉽게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는 잊으라고 말하며, 누군가는 다 괜찮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좋았던 것만 기억하자고 말한다. 그녀는 정말로 안고 가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랐을까. 어쩌면 끝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그저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도리일 세상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섣불리 말하는 대신,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신철규, '눈물의 중력',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서, 문학동네시인선 096, 2017)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때리고 나서도 바로 안아줄 수 있는 게 또 사람이기도 하니까.
앞서 인용한 시인이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통해 전한 말 역시 생각이 나서 일부 덧붙이고자 한다.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받은 사람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이 슬픈 영화를 통해 나는 오늘도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섣부른 말 대신, 한 번 더 생각하기. (★ 7/10점.)
*글을 끼적이며 슬픔에 관한 시에서 부분을 가져왔지만, 이 영화는 슬픔 같은 감정이나 내면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더 집중한다. 아마도, 감정은 개인의 고유한 것이지만 사건은 비슷하게나마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