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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27. 2018

타인을 이해한다는 오해에서, 오해한다는 이해로

영화 <죄 많은 소녀>(2018)를 보고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에서, 문학동네, 2009, 316쪽.)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컷


내 잘못이다, 라고 말하기보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라고 말하거나, 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서야 '사실은 그때...'라고 겨우 입을 열곤 하는 게, 사람 일이라서. 나는 그래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마땅히 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입을 앙다문 채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숨을 내쉰다. 어떤 경우 그에게는 그저 내가 당신의 말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최선일 수 있으니까. 그냥 최선 말고, 그가 원하는 바로 그 최선.


대략 그런 생각들을 하며 <죄 많은 소녀>를 봤다. 각본과 편집을 겸한 연출의 공이 대단했고 또한 배우의 존재가 단단했다. 다만 중반 이후 펼쳐지는 몇 개의 주변 가지는 조금 덜어냈어도 좋았을 것이라 느꼈고, 여러 경우 음악은 그 효과나 의미와 별개로 다소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영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지 않은 것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라고 느꼈다. 이를테면 너무 어두운 공간인 탓에 보이지 않는 표정, 또 이를테면 뒷모습으로 인해 볼 수 없는 앞모습 같은 것. 사건이 사건에 그치지 않고 서사에 합류할 때, 배우는 영화 언어로서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생명력을 지닌다.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컷


타인의 비극에 사람은 쉽게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는 잊으라고 말하며, 누군가는 다 괜찮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좋았던 것만 기억하자고 말한다. 그녀는 정말로 안고 가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랐을까. 어쩌면 끝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그저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도리일 세상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섣불리 말하는 대신,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신철규, '눈물의 중력',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서, 문학동네시인선 096, 2017)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때리고 나서도 바로 안아줄 수 있는 게 또 사람이기도 하니까.


앞서 인용한 시인이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통해 전한 말 역시 생각이 나서 일부 덧붙이고자 한다.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받은 사람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이 슬픈 영화를 통해 나는 오늘도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섣부른 말 대신, 한 번 더 생각하기. (★ 7/10점.)



영화 <죄 많은 소녀> 메인 포스터

*글을 끼적이며 슬픔에 관한 시에서 부분을 가져왔지만, 이 영화는 슬픔 같은 감정이나 내면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더 집중한다. 아마도, 감정은 개인의 고유한 것이지만 사건은 비슷하게나마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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