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
한국전쟁 당시 폴란드로 가게 된 고아들이 있었다는 실화 정도만을 대강 찾아보고 갔다가,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에서는 그 이상의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났다. 모든 아픔과 슬픔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60년도 지난 일들에 대해 지금을 사는 나, 혹은 우리로서는 벌써 먼 과거의 일 같지만 누군가에겐 그것이 여전히 현재다.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다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게 바로 그 사랑의 말을 직접 전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잊힐 수 있었던 먼 나라에서의 이야기는 서역 땅에 묻힌 동양인 아이의 무덤에 얽힌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된 어떤 사람에 의해 세상에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장 최근 개봉한 브래들리 쿠퍼 감독의 <스타 이즈 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해외에서야 많이 접할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배우가 직접 연출을 도맡은 사례가 아주 흔하지는 않다. 근래 들어서야 하정우, 유지태, 구혜선 등 감독에 도전하거나 활동을 이어가는 배우들을 조금씩 볼 수 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 역시 배우 추상미의 연출작이다. 게다가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사례라 하겠다. 그는 단지 연출만 한 게 아니라 작품 내 화자로, 이야기에 출연도 하고 그것을 이끌기도 한다. 나아가 작품 전체가 지닌 감정의 흐름이 있다면, 이는 상당 부분 배우 추상미, 감독 추상미 본인의 공 내지는 본인의 역할로 인해 나온다. 그러니까, 연출자이자 화자이자 스스로 대상이 되는 인물, 을 보는 낯선 기분이 들면서도 반 세기도 더 지난 일이 여전히 현재에도 끝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체감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역시 영화 장르의 하나이며 어떤 소재와 대상을 다루든 그것을 작품으로 담고자 하는, 연출자의 의도가 최소한이라도 들어간다. 그러니까,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완전히 날것 그대로의, 조금도 가공되지 않은 피사체만이 담겨야 한다는 건 오해에 가깝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법이자 수단으로써, '허구의 이야기'를 창조하지 않고 실제 대상의 모습을 특정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관찰하거나 따라가는 기록일 테니까. 그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익숙하게 가늠할 법한, 연출자와 피사체 간의 거리감을 상당 부분 허물거나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가 관객 각자에게 어떤 감흥으로 다가갈 것인지는 여기에 달려 있다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장르 자체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이 이야기가, 지금 왜 필요한지, 다음 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될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할까.
글을 쓰는 본인에게도 전쟁과 분단은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상에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북한과 관련한 뉴스가 들려올 때면 그때 잠깐, 그러다 다시 평소의 생업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잊고 지내거나 평소에 자주 생각할 기회는 없을지도 모르는 어떤 비극에 대하여,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유럽 땅에서 누군가가 여전히 아파하며 슬퍼하며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 남과 북의 두 여성이 함께 떠나는 이 여정은 우리가 배운 역사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일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발자취가 되고 있다. 78분의 짧은 상영시간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겠고 누군가는 저 먼 폴란드 땅이 마치 이웃처럼 느껴지기도 하리라.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 추상미 감독
2018년 10월 31일 개봉, 78분, 전체 관람가.
출연: 추상미, 이송 등.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 (2018년 10월 23일, 메가박스 코엑스)
*<폴란드로 간 아이들> 메인 예고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