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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05. 2018

"아들, 책 냈다면서 말 안했네"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어느 이자카야에서 친구를 만났던 날.


채사장 작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스스로도 누군가를 새롭게 사귀는 일은 참 잘하지 못한다고 늘 생각하는데, 이렇게 생각지 못한, '친구의 친구'를 만나는 그런 일은 그래서 새롭고도 멋쩍다. (나는 꽤 취향의 폭이 좁은 사람이라, 콘텐츠에 대한 비슷한 산업적 인식이나 조예가 있는 이를 만나는 일은 다행스럽기도 한 것이다.) 문화 콘텐츠에 대한 서로의 다양한 다름들을 오늘도 접한 시간. "오늘 바쁘나"라는 급 연락이 고마웠던 저녁이다. (그것도 "지금 바쁘나"라는 말을 내가 곡해했던 것이었지만) 세 시간의 대화는 사케 서너 잔과 하이볼 한 잔으로 족했다.


동창이든 동아리든 어디든 누구든 나는 이른바 '챙길 수 있는 사람'의 범주와 범위도 넓지 못하여, 그렇게 연락 주는 이의 존재가 고맙기도 하고. 나는 여전히 좁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는, 과한 겸손이 아니라 얼마간의 진실이다. 대학을 졸업하기 두 학기 전에, 모 영화매체에서 1년간 객원기자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가족에게 마치 흔한 대외활동처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적어도 내 판단에, 일반적인 기성세대에게 있어 "공부" 외의 것은 독서조차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일이 흔하니까. 내 글이 실린 잡지가 나오고 매체를 벗어나서 종종 기고를 할 때도 나는 부모에게 먼저 이야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 잡지가 나왔을 때도 그걸 집에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어릴 적 쓰던 책상의 한쪽 구석, 졸업 앨범 곁에 한적하게 꽂혀 있는 걸 보고 이후에는 책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날, 엄마의 카톡. 엄마는 내 책 이야길 형에게서 뒤늦게 접하셨다.


직업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는 마찬가지인데, '기자'의 직함을 벗어난지는 한참이 지났음에도, 마케터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부모님께 나는 '기자'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냥 '영화에 미쳐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극장에 비치된 전단의 앞뒷면 곳곳을 가리키며 "이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이런 사진이랑 문구는 어떤 식으로 조합되어 제작되고 전국 극장에 유통되는 건데 제가 하던 일이 이런 거 만드는 일이었어요"라고 몇 개의 언술들로 '내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설명하려 한 건 얼마 전 추석이 처음이다.


영화 리뷰를 모은 책을 만들었을 때도 정작 나는 가족을 독자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단지 소비하지 않고 향유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사명을 세웠음에도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연평균 4.25편 남짓의 영화를 보는, 가벼운 오락 영화를 찾는 일반적인 범주의 관객을 위한 글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일정 부분 모순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바는 안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그 영화들이 있으니까.


지금도 나는 관객 자신이 스스로 필요나 계기를 느끼지 않는 이상, 영화에 오락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관객에게 "영화는 이런 가치가 있는 거니까 더 오래 깊게 많이 보세요" 같은 식의 합리적 설득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설득이 아니라, 감화와 영향의 영역이다. "재밌었다" 혹은 "재미없었다"를 초과하는 감상을 시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140자의 초단문도 '읽기 싫은 긴 글'에 그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는 '영화를 오래 견문하고 깊게 생각하며 보는 사람'이 소수가 아닌 다수가 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다. 다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읽겠지'라고 여기며 쓸 뿐이다. 내 글의 첫 독자는 나 자신이니까.


형은 영주를 벗어나 대학에 가고 나서 어릴 때보다 더 거칠고 투박한 부산 남자가 되었지만, 이런 면에서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엄마랑 10분 이상 통화해본 적 있냐"라고 일침 한 것도 형이었고, "네가 하는 일 얘기 좀 많이 해드려라"라고 충고한 것도 형이었다. 전부터 형이 책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형이 글도 좀 쓰고 말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글만 쓰고 말은 거의 하지 않는 사람, 에 가깝겠다. 어제 귀가길엔 "답장 안 해도 상관없고 해도 상관없다"라며 형에게 장문의 카톡이 와 있었고, 며칠의 시간차가 있지만 엄마에게는 "책 나왔다면서"로 시작하는 짧고 집약적인 카톡이 왔었다. 당연히 형을 통해 부모님 귀에 들어간 거다.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그때는 좀 더 친구 같은 아들이 될게요." 어쩌면 나는 이번 생에도, 아니 이번 생에만 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에 다음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유보시켰고 유배시킨 것이었다. 가족에게는 조금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부모님에게는, 내가 어떤 영화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고 특정한 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단지 "아들이 책을 썼다"라는 명제 자체가 그 모든 것일 테니까.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강세형). 다음주에는 집에 책을 몇 권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무거워진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다가.


실은,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이란 문장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살갑게 친하게 대하려 애써보는 아들'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친구 같은 아들'이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어쩌면 부모님은 그때까지 날 기다려주지 않을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저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쓰는 사람이었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을 '편한 것'이라 여겨오며 자랐으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삶의 방식과 태도란 얼마든지 바뀌기도 하지만 아주 쉽게 바뀌는 건 아닐 테니까. 그저, 어제 해보지 않았던 무언가를 오늘 한 번쯤 해보는 것. 그뿐이다. 어제는 저녁에 딱히 용건 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가 오간 후 엄마가 말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나는 "아니요, 그냥 생각나서 걸었어요."라고 했다. "어이고 아들이 왠일로 전화를 그리 다 하고." 가끔은, 노트에 무언갈 적는 대신 전화를 걸어야지, 누구에게든. 생각이 나서, 목소릴 듣고 싶어서, 그냥, 보고 싶어서, 그런 말들을 꺼내며. 간혹 통화의 끝맺음에는 이런 말을 꺼내는 날도 있겠지. 사랑해요. 오늘은 엽서를 꺼내 편지를 쓰려 한다. 이야기는 꽤 길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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