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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23. 2018

그냥 그래서 고마워, 라고 말하게 되는 사람들

2018년 12월 19일의 일기 혹은 편지


내 넓지 않은 인적 네트워크에 당신들이 있다는 건 정말 소중하고 기쁜 일이야. 세 시에 만나기로 해놓고 두 시 사십오 분쯤 하나 둘 나타나는 사람들. 형은 냅킨을 가져오더니 거기 이야기를 써주는 거고 누나는 언제 샀는지 내 책을 사인해달라며 슬쩍 내미는 거야. 음료가 한 모금 두 모금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는 우리가 '연말'이나 '새해' 같은 단어들을 함께 이야기하는 게 몇 번째 해인가 생각해보면서, '계절'이나 '커피' 혹은 '영화' 같은 단어를 이야기해보는 게 과연 몇 번째인가를 셀 수 있을는지 돌이켜보면서. 많은 말 하지 않고 듣기만 하여도 좋고, 굳이 서로의 관점이 같지 않아도 더할 나위는 굳이 없고.


나는 멋쩍고 수줍게 사람의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관한 다카하시 아유무의 몇 문장을 속으로 떠올리며 이런 겨울에 꼭 어울리는 박준의 시 몇 줄을 슬며시 공유했지. 돌이키면 우리의 처음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같은 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아. 다만 그 시작에 영화라는 관심사가 있었다는 것과 그 계기가 인스타그램이라는 이 가상공간이었다는 것만이 기억돼 있을 따름이지. 해시태그 같은 것이나 취미나 관심사 같은 것으로 말해볼 수 있을 것들. 커피로 시작해 양꼬치를 먹고 나니 3차는 다시 커피. 오늘도 훗날 2018년 12월 19일 목요일 망원역 2번 출구 ㅇㅇㅇ! 같은 걸로 기억할 리는 없겠고 그때 양꼬치 거기! 정도로 떠올릴 수 있겠지. 이야기는 멈추는 게 아니라 늘 시작되기만 하지. 꿈의 한가운데인 것처럼 시작보단 거기 있다는 게 중요하고 과정이 먼저지.


우리는 앞으로도 몇 잔의 커피를 더 마실 테고, 양꼬치나 피자, 혹은 맥주, 아이스크림, 뱅쇼, 그런 것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기도 할 거야. 정확히 누군진 몰라도 Various Artists의 음악들이 카페에 깔릴 테고, 영화 이야기만 하진 않겠지만 절대 영화 이야기를 안 하지는 않을 거고. 어느날은 카페의 영업 마감 시간이 지난 걸 보고 그제야 짐을 주섬주섬. 우리가 올해 두어 번 만났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생각나지 않고, 다만 그날 원래 가기로 했던 곳이 문을 닫아 해밀턴 호텔 뒷길에서 그냥 다른 레스토랑을 대충 찾아가 피자를 먹었단 것과, 거기서부터 대사관로를 주욱 따라 걸어서 한남오거리까지 간 것, 그리고 거기 폴 바셋에서 린이한 작가의 소설 이야길 했을 때가 아마 크어피에 얼음까지 꼭꼭 씹어 먹고는 상하목장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더 시켰을 때인가 그랬지. 헤어지고 나서 나는 한강진역까지 걸어갔고. 더위를 꽤 타는 내가 그만큼 걸을 수 있었던 건 무덥지 않은 때였으리라 짐작되어서기도 하지만 그날의 대화들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줬기 때문일 거야. 비슷한 이야기가 오늘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줬고.


이것도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님'이 아니라 이름 뒤에 형, 누나 같은 것으로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 그냥 그래서 고마워. 그럴 수 있어서. 몇 달 만에 봐도 어제 본 것 같아서 말이야. 기술이나 프레임보다 결국은 사람. 사람 안팎에 결국은 이야기. 취향(趣向)을 취향(冣香)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사람들. 나는 좋아하는 무언가나 누군가에 대해선 언제나 이야기가 길어지곤 해, 이 글처럼. 난 고작 이 정도 글을 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참 일요일 같은 목요일 저녁이지. 인사할 땐 별 거 없이 가볍게 손 흔들고 안녕, 잘 가, 정도면 충분한. 오늘 무슨 얘기 했지? 생각하면 딱히 뭐 없었던 것도 같은. 좋은 일이란 아무 일 없어도 좋은 것들이지.


그날의 커피
그날의 양꼬치
그날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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