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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05. 2018

어제도 오늘도 조금씩 내가 되어간다. 내일도 그렇겠지.

월말월시의 몇 가지 단상들 메모

11월의 마지막과 12월의 시작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다. 지난 일주일 남짓의, 몇 편의 끼적임들을 모아둔다. 모아두고 보니 일종의 근황 같은, 기록이 되어 있는 것들.




취향을 나눈 어떤 하루


책과 영화와 독립출판 이야길 하다 좋아하는 페이지나 문장이나 작가들이 문득문득 커피와 맥주 사이로 튀어 나오던 어느 밤. 좋아하는 시라며 누군가 보여준 게 나태주의 시였다. 세상에는 언어를 세심히 다루는 사람이 참 많다며, 누구는 자기 생일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는다는 사람이 있다는 둥, 누구는 매년 의식처럼 같은 시기에 같은 노래를 듣는다는 둥, 포르투와 뉴욕 이야기와, 자우림, 심규선, 브로콜리너마저 등 아티스트 이야기를 오가다 보니 모든 이야기는 결국 취향이었다. 그거면 되었던 날. 이렇게 취향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며 좋았으면 좋겠다. 그동안은 그러질 못했기 때문이다. 고요해도 되는 저녁에 애써 소리를 만드는 일 같은 것. 즉 거리를 지키지 않거나 못하는 일 같기도 한 것. (2018.11.28.)


나태주 시 '멀리서 빈다'를 내게 건네준 이에게 고마움을.



브런치 구독자 1만 명 넘어서다


몇 가지 이유로 인해 허수가 좀 있으나, 1만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볼 수는 있겠다.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린 것은 2015년 9월 4일이다. 인스타그램은 2014년, 네이버 블로그는 2013년이 시작이었다.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 오직 답할 수 있는 건 그저 계속 고쳐 쓰는 사람이라는 것뿐이라, 앞으로도 나는 꾸준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볼 작정이다. 그 길에 무엇이 있든 나는 씀으로써 나아지고 달라질 테니까. 현재 전체 글의 누적 조회 수는 93만 2천 가량이라 한다. (2018.11.29.)





2018년의 사사로운 목록


아직 올해가 다 가지 않았지만, 미리 안녕해 두는 마음으로 영화와 책을 조금 추렸다. 올해 국내 개봉하거나 출간된 것들 중에서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테지만, 12월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8년의 '동진영화'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 마틴 맥도나)

*<레디 플레이어 원>

(Ready Player One / 스티븐 스필버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Visages, Villages / 아녜스 바르다 & JR)


2018년의 '동진책'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황현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유희경, 문학과지성 시인선 508)


그 외: (그러니까, 이른바 Best 3 안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언급해두고 싶은 것들)

<원더스트럭>(Wonderstruck / 토드 헤인즈)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 / 션 베이커)

<디트로이트>(Detroit / 캐서린 비글로우)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김금희)

『여행하는 말들』(다와다 요코)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기주)


<쓰리 빌보드>의 국내 개봉 당시 CGV에서 만든 포토티켓들.



*

혹시나 이 끼적임을 읽을 누군가는, 대체 이 사람이 저 영화들 세 편을 왜 꼽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수 있겠다 싶어, 작성해둔 리뷰들의 제목과 링크를 같이 첨부해둔다. 특히 <쓰리 빌보드>는 내가 생각해도 참 많이도 써놓았다.


*<쓰리 빌보드>

'여정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감정이 집약된 걸작' (2018.03.05.)

'그녀는 왜, 아무도 찾지 않는 세 개의 빌보드를 보았나' (2018.03.18.)

'언어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 언어의 무게에 관하여' (2018.03.24.)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과, 그 언어들의 무게' (2018.08.02.)

'반드시 삶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언어들의 발화(發火)' (2018.08.08.)


*<레디 플레이어 원>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위한 한 편의 지도' (2018.03.27.)

'대중문화를 향한 순수한 애정, 그 감동적인 집합체' (2018.03.28.)

''좋아하는 것'을 순수히 좋아한 자들의 취향 공동체' (2018.05.16.)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예술의 존재' (2018.06.24.)






듣고 또 들은 Coldplay의 'Fix You'를 또 다시 들으며, 언제나처럼


사람의 곁에 음악이 있다는 것, 그걸 가슴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 슬며시 다가와, 반드시 치유해줄 거라는 확언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 몸을 가만히 적시며 너만이 느끼는 그 고유한 슬픔을 낫게 해 줄 거라고 ('try to fix you') 다감히 이야기 건네는 것. 확신하지는 않은 채로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는 ('I will try') 것. 눈을 감은 채로 혹은 누군가를 부둥켜안으며, 혹은 빛을 바라본 채, 보이는 것을 듣고 또 들리는 것을 보며 시공간을 가득히 느끼게 해주는 것. 음악이 하는 일이란,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너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 다만 먼저 말하는 게 아니라 들을 때까지 한없이 거기서 기다릴 줄을 아는 일이다. 무작정 잡아끌지 않고 내가 걸음 할 수 있을 때까지 눈짓만 해주는 ('guide you home') 것. 세계 어디에서든,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것.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은 느껴진다. ('Lights will') 노래는 멈추지 않고 마음에 산다. 음악도 흐른다 하고 삶도 흐른다 하듯이.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 물에 번지는 이름 / 살아 있자고 했다' (안미옥, '아이에게', 『온』에서) 한 계절의 기척을 다 보내고 나서도. 다시. (2018.12.02.)


When you lose something you cannot replace.
Lights will guide you home,
I will try to fix you.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과 그에 대한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읽으며


"(...) 이쯤 되면 우리야말로 여러 갈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외로운 선택을 한 사람의 자기 긍정을 표현한 시? 자의적 선택에 사후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꼬집은 시? 후회가 많은 이에게 들려주는 부드러운 충고의 시? 나의 대답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한 번 놓친 길은 다시 걸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 시는 말하지만, 작품은 길과 달라서, 우리는 시의 맨 처음으로 계속 되돌아가 작품이 품고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남김없이 다 걸어도 된다.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해석에 관하여 쓴 신형철 평론가의 기고 글 중에서.
("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
신형철의 격주시화 (隔週詩話) - '가지 않은 길' 속의 여러 갈래 길, 2016.07.01 한겨레) (전문 링크)


단지 거기까지였을 것들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다듬었다. 스스로를 '쓰는 사람'이라고 칭하는 일에 기꺼이 위협을 가할 만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지나간 선택들을 되짚었고 그 선택들로 인해 생겨난 일들을 생각했다. 선택하지 않았거나 그랬어야 하는 것들도 생각했다. 이것은 얼마만큼의 과정인 것이냐는 물음을 품은 채로 가을의 끝을 나는 내내 앓았다. 그래야만 했다. 지난 계절이 오래 기억 속에 잊히진 않겠지만, 부러 생각하고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뒤를 떠나 앞을 보고 걸어야겠다. 그건 정말 그래야 했을 일인지 모른다. 더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돌아보고, 다시 보고, 고쳐 쓰는 일은 영화와 책에서만 할 것이다. 이 생은, 갔어야만 한다고 여겼는데 그러지 못한 길보다는 가게 될 줄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길이었던, 것들의 합이 만들어내는 오늘로 살아질 것이다. 주어진 길을 꼿꼿하게 걸어가야지. 고개 들고, 허리 펴고, 가볍게 주먹 쥐고. (2018.12.03.)


'종점' 정류장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시점' 정류장도 있다.




영화보다 시집인 나날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리뷰 쓰려고 원작 소설까지 샀는데 곁에 있는 시집을 슬쩍 펼쳤고 덮을 수가 없다 글은 내일 써야지 소설도 내일 읽어야지 내일의 나 화이팅)

(영화를 보거나 그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쓰는 시간보다 시집을 끼고 지내는 시간이 많은 며칠이다.)

(김소연, 박준, 허수경, 김상혁, 유희경, 이병률, 천양희, 한강, 이훤, 이제니, 이응준, ... 등등.)

(폰 사진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책 읽다가 마음이 머문 페이지들 찍어놓은 것들.)


(2018.12.04.)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서. 곧 나올 그의 새 시집을 기다리며.



'슬픈 영화' 생각


보고 싶은 영화를 몇 편 추천해 달라는 이야길 듣고 내 왓챠 DB를 뒤적거리며 생각나는 몇 작품들의 이름을 읊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별 의미 없이 네이버에 '슬픈 영화'라고 입력해보았더니 연관 검색어가 흥미롭기도 해서 캡처를 해두었다. 슬픔의 정의는 모두에게 다르고, 그것의 정도와 모양도 다르다. 최근에는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검색어들에 나온 엄청, 정말, 눈물나게, 같은 앞의 말들은 바로 그 리듬이 반영된 것일 테다. 추천, 같은 뒷말은 바로 그 영화가 자신에게 지금 필요하다는 감정의 표시일 것이다. 따지자면 하나 더 있겠다. 영화 <싱 스트리트>(2015)에서 '라피나'(루시 보인턴)가 말하는 "Happy Sad" 같은 것. 슬픔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은 슬프게도 그 슬픔들을 겪어봐야만 가능한 건지 모른다. 여러 영화들을 생각한다. 슬픈 사람들이 늘 많은 모양이다. 불과 며칠이면 낮 최고 기온도 영하에 머무는 날이 오겠다. 그들의 올겨울이 조금은, 그래도 조금은, 덜 추웠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다. 그러다 지나면 양귀자의 소설집 제목처럼 "슬픔도 힘이 된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차근차근, 천천히. (2018.12.05.)


네이버 '슬픈 영화' 연관검색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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