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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15. 2019

말을 지켜낸 사람들이 오늘에게 남긴 발자취

영화 <말모이>로부터

'조선어학회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 <말모이>는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됐지"라 말하는 '판수'처럼, 뜻만 통하면 상관없다는 듯 국적불명의 축약어가 언어로서가 아닌 기호로서 난무하고, 나아가 말과 글의 온도와 무게가 직관적인 영상과 이미지에 밀려 경시되는 시대에 등장한 소중한 영화다. 무장투쟁처럼 물리적이고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항일 운동과 달리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은 영상 매체로 다뤄내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데, 주인공 '판수'가 까막눈이라는 설정은 그 점을 어느 정도 보완하는 영리한 한 수다. 감옥소를 여러 차례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판수'가 주먹이 아닌 말의 힘을 깨달아가는 건 대부분 딸 '순이'를 통해서고 그 정황 역시 조선어 말살정책과 창씨개명으로 인한 것들로 대부분 채워진다. 그런 '판수'의 변화와 그가 단순한 심부름꾼에서 점차 조선어학회의 주역으로 깊이 몸담게 되는 과정은 영화에서 그럭저럭 착실히 제시된다. 그러나 삼엄한 탄압으로 인한 학회의 시련이 마치 준비된 것처럼 누군가의 염려나 용기로 모면되거나 해소되는 가운데, 학회 사람들 간의 연대가 주는, 혹은 단합의 과정에서 전해지는 감정적인 울림은 대부분 대사로 전해지는 개인의 사연이나 일제의 억압이라는 배경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일 뿐 여러 캐릭터들의 합이 쌓아 올려낸 산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정환'의 아버지나 '판수'의 아들이 어느 순간 홀연히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것 역시 효율로서는 납득되나 이야기의 맺음새로는 한 점 의문을 남기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은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처럼 특정 인물의 퇴장이 장면과 장면의 전환과 흐름에 있어서는 금방 잊히는 듯한 인상 역시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남기는 발자취와는 썩 조화롭지 않게 다가오기도 한다. 에필로그 역시 영화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듯 낯설다. (201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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