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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21. 2019

달이 떴다고 카톡을 하시다니요.

당신만이 가을인 줄 알았던 때

몇 년 전에 읽은 한 에세이에서 본, "오늘 달이 참 밝네요."라는, 'I love you.'를 직역하기 쑥스러워 달 핑계를 대었다는 어떤 이야기가 있다. 달에 특정한 의미를 두는 것이라기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밤) 하늘을 올려다본 적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며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를 다시 떠올렸다.


더 이상 당신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노트에 쓴 건, 그러니까 거짓말이었다. 보름날의 달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지난 가을을 생각했다. 영화 한 편, 시집 한 권, 커피 한 잔, ooo번 버스, oo역 o번 출구, 그런 것들이 고스란히 하나의 계절이 되었던 날들이 있다. 이제 더는 생각하지 않겠다고 해놓고서는, 달을 핑계 대는 건 전적으로 내가 미진하고 어떤 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누군가는 미련이라 할 테고 누군가는 뒤끝이라 하겠지만 내게는 그냥 생각이다. 사람을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 자체를 생각하는 일이겠다.


'역과 연결된 지하상가로 들어가 팔 번 출구로 나온 다음 그대로 오 분 정도 걸어오면 전주 회관이 나오고 그 건물을 끼고 우측으로 더 걸어오면 안경원이 나오는데 거기서 길을 건너 두번째 골목으로 들어오면 내가 살고 있는 붉은 벽돌집이 있다 그 집의 오전에는 해가 들고 오후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박준, '미로의 집' 전문,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잘 알지도 못하는 시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건 언제나 누군가가 곁을 떠났을 때, 하나의 계절이 끝났음을 사람으로 실감할 때, 혹은 마음 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때였다. 이제 내 가을이 저 시처럼 비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가 가졌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라는 황현산 선생님의 책 속 문장을 늘 떠올린다. 사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졌던 것.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쥐여주던 한철이 있었다는 건 언제고 생각해도 소중한 일이다. 그러니까, 저 시를 떠올린 건 그만큼 어떤 계절의 기억은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아주 오랫동안 남아 언제든 환기될 준비가 된다는 것.


보름이라고 했지만 오늘의 달이 다른 날보다 유난히 밝은 건 아니었다. 나는 더 크고, 더 밝고, 더 낮게 떠 있는 달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전화를 주실' 만큼 밝은 건 아닌데 어쨌든 밝기는 해서 '카톡 할 만큼'은 된다는 오늘 대화한 누군가의 표현을 잠시 집어다 제목에 넣어 두었다. 사실 박준의 시는 어느 계절, 어느 때고 내가 항상 끼고 다니는 시 중 하나이므로, 정말 마음이 밑바닥이었던 때의 시는 따로 있다. 박소란의 지난 시집을 읽는 내내 아팠다. (이번 새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은 자연히 그때 생각을 하며 구입했다.)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박소란, '노래는 아무것도' 부분,
『심장에 가까운 말』에서 (창비시선 386)


내 감정만 들여다 보기 바빴고 당신이 당신이어서, 그리고 당신이 내 곁에 있었음으로 인해 지녀야 했을 아픔은 돌아보지 못했던 때. 그땐 정말로, 나를 떠나간 당신이 아프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못된 마음이다. 사랑 앞에서 우린 이기적이고, 지난 사랑 앞에서의 우리는 더욱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제는 지난 사랑을 두고 초연해질 때도 되었건만, 어떤 계절은 도저히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한 사람 대신 다만 한 계절을 떠올려 봄으로써 '그때 내가 그랬었구나' 하고 돌아볼 따름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었던 노래라든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보았던 공연이라든가, 자정이 넘은 시각 함께 보았던, 아침이 되어서야 상영관을 나섰던 심야 영화라든가. 제 말하기보다 글 속으로 숨기 좋아하고 스스로의 문장을 쓰는 일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대신 꺼내어 보는 일도 좋아하는 터라, 마지막으로 시 하나를 더 꺼내 두어야겠다. 그해 가을은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한 번 더 다짐해 보면서. (2019.02.20.)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류근, '祝詩' 부분,
『어떻게든 이별』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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