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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출구가 추억이 될 수 있나요

논현역 8번 출구와 어느 서점

by 김동진

논현역 8번 출구의 계단은 추억으로 가득하다. 먼저 북티크. 아니, 이곳의 모든 추억은 그곳으로부터 시작했다. 당시 인스타그램으로만 알고 지내던, 책과 영화 이야길 나누던 이로부터 어느 날 메시지를 받았다. 요는 "여기서 이날 이런이런 행사가 있는데 동진 씨도 오면 좋아할 것 같아요!"라는 말이었고, 북티크라는 처음 들어본 서점이라는 곳에서 열리는, 와인과 책을 곁들인 작은 일회성 모임이었다. 공간이 궁금해졌지만, 얼마든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넓고 넓어 다 걸음 해보지도 못할 세계에서, 낯선 장소에 한 번쯤 발 디뎌 보는 건 그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의 내게는 반드시 그래야겠다고 느낄 만큼의 무엇이었다.


03.jpg 그곳에 함께 모여 영화를 보던 어느날


2015년 4월의 어느 저녁. 그날, 그 시간, 그 장소, 그곳의 사람들은 내게 새로운 세계 하나를 열어주었다. 공간에 매료된 후 다른 요일의 두 개의 독서모임을 신청했고, 운영진과 친해져 자연스럽게 영화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군데의 직장을 거치는 가운데, 두 번의 연애를 거치는 동안, 미처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떠나거나 끊어지거나 했다. 그리고 여전히 닿아 있는 사람들, 서로를 응원하는 사람들, 그들이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걸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억한다.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건 곧 나의 세계를 넓혀나가는 일과 같다. 지금 내게 가능한 많은 것들은 4년 전 봄날 저녁의 와인 한 잔과 책 한 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때부터 종종 찾았던, 근처의 치킨집은 다소 오랜만에 방문했음에도 그때 그대로였다. 공용이었던 옆 건물 1.5층 화장실은 리모델링을 했는지 남녀가 분리되어 있었다. 바뀐 것이라면 메뉴의 가격이나 구색 정도겠지만, 사장님의 얼굴이나 공간의 분위기 같은 건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신사역 인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나서, 갑작스러운 저녁 약속을 신논현역이 아니라 논현역 쪽으로 잡은 건 잘한 일이었다.


하루 잠깐의 저녁 동안 4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 걸어왔다. 8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횡단보도를 건너고자 손을 흔들던 많은 사람들. 함께 읽거나 각자 읽었던 셀 수 없는 책들. 직접 골라 모임을 함께한 수십 편의 영화들. 그리고 그 많은 날들의 하루하루 생각했던 많은 감정들. 여전히 거기 있었다. 봄을 지나 다시 봄이었고, 입고 온 겉옷 하나를 벗어 들고 다녀야 할 만큼 추위는 사라져 있었다. 수많은 관계들을 시작되게 만든 말 한마디. 내 관계의 국면을 새로 쓰게 된 습관과도 같은 말 한마디. 출구는 곧 입구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어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사람을 향하는 눈빛, 말하고 글 쓰는 방식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건 '나를 뺀 세상의 전부'(김소연) 인지도 모르겠다. (2019.03.05.)


이 사진에 기록된 일자는 2016년 6월 17일이다. 논현역 8번 출구.

추억이 생긴 장소라, 논현역에 올 때마다 종종 이 8번 출구로 나와서 사진을 찍었다. 그 많던 사진은 찾으려니 다 어디로 간 걸까. 클라우드를 뒤적거리다 겨우 하나를 발견했다. 그마저도 원본이 아니라 필터 앱에서 후처리를 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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