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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9. 2019

지하철역 출구가 추억이 될 수 있나요

논현역 8번 출구와 어느 서점

논현역 8번 출구의 계단은 추억으로 가득하다. 먼저 북티크. 아니, 이곳의 모든 추억은 그곳으로부터 시작했다. 당시 인스타그램으로만 알고 지내던, 책과 영화 이야길 나누던 이로부터 어느 날 메시지를 받았다. 요는 "여기서 이날 이런이런 행사가 있는데 동진 씨도 오면 좋아할 것 같아요!"라는 말이었고, 북티크라는 처음 들어본 서점이라는 곳에서 열리는, 와인과 책을 곁들인 작은 일회성 모임이었다. 공간이 궁금해졌지만, 얼마든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넓고 넓어 다 걸음 해보지도 못할 세계에서, 낯선 장소에 한 번쯤 발 디뎌 보는 건 그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의 내게는 반드시 그래야겠다고 느낄 만큼의 무엇이었다.


그곳에 함께 모여 영화를 보던 어느날


2015년 4월의 어느 저녁. 그날, 그 시간, 그 장소, 그곳의 사람들은 내게 새로운 세계 하나를 열어주었다. 공간에 매료된 후 다른 요일의 두 개의 독서모임을 신청했고, 운영진과 친해져 자연스럽게 영화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군데의 직장을 거치는 가운데, 두 번의 연애를 거치는 동안, 미처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떠나거나 끊어지거나 했다. 그리고 여전히 닿아 있는 사람들, 서로를 응원하는 사람들, 그들이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걸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억한다.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건 곧 나의 세계를 넓혀나가는 일과 같다. 지금 내게 가능한 많은 것들은 4년 전 봄날 저녁의 와인 한 잔과 책 한 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때부터 종종 찾았던, 근처의 치킨집은 다소 오랜만에 방문했음에도 그때 그대로였다. 공용이었던 옆 건물 1.5층 화장실은 리모델링을 했는지 남녀가 분리되어 있었다. 바뀐 것이라면 메뉴의 가격이나 구색 정도겠지만, 사장님의 얼굴이나 공간의 분위기 같은 건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신사역 인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나서, 갑작스러운 저녁 약속을 신논현역이 아니라 논현역 쪽으로 잡은 건 잘한 일이었다.


하루 잠깐의 저녁 동안 4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 걸어왔다. 8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횡단보도를 건너고자 손을 흔들던 많은 사람들. 함께 읽거나 각자 읽었던 셀 수 없는 책들. 직접 골라 모임을 함께한 수십 편의 영화들. 그리고 그 많은 날들의 하루하루 생각했던 많은 감정들. 여전히 거기 있었다. 봄을 지나 다시 봄이었고, 입고 온 겉옷 하나를 벗어 들고 다녀야 할 만큼 추위는 사라져 있었다. 수많은 관계들을 시작되게 만든 말 한마디. 내 관계의 국면을 새로 쓰게 된 습관과도 같은 말 한마디. 출구는 곧 입구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어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사람을 향하는 눈빛, 말하고 글 쓰는 방식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건 '나를 뺀 세상의 전부'(김소연) 인지도 모르겠다. (2019.03.05.)


이 사진에 기록된 일자는 2016년 6월 17일이다. 논현역 8번 출구.

추억이 생긴 장소라, 논현역에 올 때마다 종종 이 8번 출구로 나와서 사진을 찍었다. 그 많던 사진은 찾으려니 다 어디로 간 걸까. 클라우드를 뒤적거리다 겨우 하나를 발견했다. 그마저도 원본이 아니라 필터 앱에서 후처리를 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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