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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우러러보되 발 붙이고 있는 여기를 사랑할 것이다.

<업>(2009), 피트 닥터, 밥 피터슨

by 김동진

떠 있는 풍선을 한없이 바라보면 어느새 누군가의 지난 꿈들이 거기 있다. 픽사 애니메이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장점들 중 무엇보다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바로 깊이 있는 이야기 그 자체이며 잘 세공된 작품 속에 절묘하게 담긴 유머와 감성이다. 후반부 프레드릭슨의 '모험 노트'에 "당신과의 모험 고마웠어요. 이젠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요!"라 적힌 엘리의 글귀가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업>이 시작한 후 15분 정도까지 펼쳐지는, 과거 젊은 날의 프레드릭슨의 꿈과, 엘리와의 평생을 지켜온 사랑 때문이다. 이제 엘리를 먼저 떠나보낸 후 프레드릭슨에게 남은 건, 오로지 그녀와 일생을 함께 보낸 집 한 채가 전부다. 우편함에는 근처 양로원에서 날아온 팜플릿이 꽂혀 있고, 주변은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건설업자가 그의 집도 매입해 허물어버릴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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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프레드릭슨의 집이 처음 바닥에서 떠오르는 순간 사용된 헬륨 가스 풍선은 약 2만 개 정도, 실제로 집 한 채를 띄우기 위해서는 그것의 1천 배가 넘는, 2,600만 개 정도의 풍선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실사영화보다도 오히려 더 깊고 순수한 감성을 <업>은 전달해낸다. 수많은 영화 속 인물들이 갖가지 이유로 모험을 외치고 무용담을 들려주며 여정을 떠나지만 <업>의 주인공처럼 더 확실하고 분명한 동기를 지닌 인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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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슨에게는 찰스 먼츠의 영웅담을 접하면서 모험을 꿈꾼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아내와 공유하며 자신의 앨범을 만들었다. 러셀이 온갖 배지로 치장하고 GPS를 들고 고글을 낀 채 요란하게 등장하는 것과 달리 프레드릭슨(과 엘리)의 일생의 모험은 별 다른 게 있지 않다. 생일 같은 날들을 소소하게 축하하고, 함께 앉아 사진을 찍고, 동산을 거닐고 다과를 즐기는 그런 것들이 그의 회상을 차지한다. 꿈이 지나간 그의 일상은 지독히 외롭고 공허하며 무기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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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밝혀지는 찰스 먼츠의 실체는,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서 집을 짓고 살겠다는 프레드릭슨의 꿈이 가치 없고 공허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오로지 남아메리카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풍선에 매달린 집을 통째로 움직여 도달한 곳이 아찔한 낭떠러지였던 것처럼, 어딘가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떠나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은, 특히 소중한 사람과의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모험처럼 즐겁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며칠만 지나면 헬륨 가스가 다 빠져 더 이상 뭔가를 띄울 수 없는 풍선처럼, 누구나 원대한 꿈을 한번쯤 품고는 하지만, 우리의 꿈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가끔은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는 것들이 분명 있다. 지나간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말하는 개들과 희귀하고 귀여운 도요새, 그리고 박 터지게 싸우다가도 아픈 허리를 부여잡는 두 할아버지들을 지나오면 <업>은 어느새 그런 인생의 가르침으로, 가르침답지 않은 뭉클함과 아련함으로 향한다. 나는 앞으로도 올려다볼 만한 멋진 꿈을 꾸겠지만, 그보다 더 꿈 같은 당신과의 삶을 사랑할 것이다. (★ 9/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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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Up, 2009)>, by 피트 닥터, 밥 피터슨

2009년 7월 29일 (국내) 개봉, 96분, 전체 관람가.


(목소리) 출연: 에드워드 에스너, 조던 나가이, 밥 피터슨, 크리스토퍼 플러머, 딜로이 린도, 엘리 닥터, 제레미 리어리, 제롬 랜프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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