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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29. 2015

한바탕 진짜 찾기,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아메리칸 허슬>(2013), 데이빗 O. 러셀

언제나 인물을 향한 치열한 고민이 느껴지는 데이빗 O. 러셀 감독의 영화. 귀를 채우는 사운드트랙에 호강하고, 70년대 후반의 미국사회에 대해 아는 만큼 더 웃긴다. 하지만 잘 몰라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제 물을 만난듯 떠들썩한 소동을 벌이는 이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유쾌하고 즐겁다. 첫 장면부터 끝까지 대본에서 걸어나온 듯한 배우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체격과 말투, 머리모양, 걸음걸이까지 모든 게 캐릭터에 최적화돼 있다. 게다가 복잡한 이야기도 활력 넘치게 끌고 가는 연출과 각본까지 영화를 빛낸다.



하나의 목적을 띤 팀에 저마다의 딴 마음을 품었던 이들이 모였으니, 거짓말과 해프닝의 연속이다. 그 가운데 자신이 모든 것을 지휘한다고 믿었던 한 인물과, 시민들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심취한 나머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던 다른 인물이 처하게 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애잔하다. 속단해서도, 믿고 싶은 것만 믿어서도 안되며, 믿을 수 있는 것을 믿어야 한다.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에 이미 있었음을 깨닫는 이야기인 <아메리칸 허슬>은 언제나 (리치의 대사를 빌려) '발끝 휘날리게' 애쓰던 이들이 발끝을 땅에 붙이고 살아야 할 때를 알게 되는 소동이다. 단순한 함정수사극일 뿐 아니라 일종의 사랑 이야기로까지 비춰지기에, 어빙과 시드니의 첫만남은 선곡과 함께 후반부의 그것과 이어져 묘한 느낌을 준다. 언뜻 복잡해보이지만 심플한 인생 교훈으로 이어지는, '난리나는' 캐릭터 코미디다.


"사실 세상은 흑도 백도 아냐, 죄다 회색이지."



본격적으로 사기 계획을 짜기 시작한 초반부, 어빙(크리스찬 베일)과 리치(브래들리 쿠퍼)는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자화상 모조품을 보면서 그리 말한다. 내 생각에도 세상은 그렇게 보는 게 맞다. 내 눈에 까맣게 보이고 싶다면 까맣고, 하얗다면 하얗게 된다. 세상에 대한 관점이 그렇듯, 스스로를 보는 자신의 눈도 그렇다. 언제나 보고 싶은 것이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자연하며, 그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관계까지 규정한다. 사람은 (거의) 항상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필연적으로 감정적인 전략이나 기술을 쓰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때로는 진심도 더 잘 전달하려면 선물 같은 포장이 필요하니 말이다.


뼛속까지 사기꾼인 어빙은 자신의 벗겨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꼼꼼하게 빗질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누가 속겠는가. 거기서 일종의 아이러니마저 발생한다. 반면 극의 초반 그가 뱃살을 훤히 드러내고 듀크 엘링턴의 노래에 심취해 있는 장면에서는 자신감이 넘친다. 스스로를 숨기지 않는다. 시드니 역을 맡은 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평소 취향과 달리 캐릭터 때문에 깊게 파인 드레스를 촬영 중 항상 입고 있어야 했다. 처음엔 민망하기도 하고 낯설었지만 그게 오히려 캐릭터를 연기하는 동안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한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끝없이 서로와 자신을 속이는 것이 영화의 핵심과도 같지만, 그들도 결국은 진짜 자신을 찾고 싶었던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정말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사람 냄새 나는 영화일 수밖에. 흑과 백이 알 수 없는 비율로 섞인 세상이지만 많은 경우 우리 삶은 사실 좀 어두워보인다. 그러나 내 삶을 규정하는 정체성을 찾는 분투의 과정을 통해, 좀 더 삶을 사랑하게 되는 밝은 마법에 빠지기. 오늘도 세상은, 그리고 삶은, 약간의 거짓 섞인 마법이다.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매일 같이 기꺼이 펼쳐진다.


그런 다반사 가운데 내 모습은 세상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다. 빽빽하게 들어찬 회색들 사이에서, 나만의 RGB값과 농도와 채도로 규정하는 내 색깔. 로잘린(제니퍼 로렌스)이 천연덕스레 갖다 붙이는 웨인 다이어의 책 제목처럼, <의도의 힘>이다. 의도의 색깔이다. 지금 나는 무슨 색인가. (★ 9/10점.)


<아메리칸 허슬(American Hustle, 2013)>, by 데이빗 O. 러셀

2014년 2월 20일 (국내) 개봉, 138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크리스찬 베일, 에이미 아담스, 브래들리 쿠퍼, 제레미 레너, 제니퍼 로렌스, 루이스 C.K., 로버트 드 니로, 잭 휴스턴 등.



P.S. 영화 <아메리칸 허슬> 삽입곡들


"Dirty Work" by Steely Dan

"Goodbye Yellow Brick Road" by Elton John

"Live and Let Die" by Paul McCartney

"Long Black Road" by Electric Light Orchestra

"10538 Overture" by Electric Light Orchestra

"Jeep's Blues" by Duke Ellington

"Delilah" by Tom Jones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by Bee G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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