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조금씩, 가까이에서 더 가까이
'당신의 아픔을 알아가는 것
나의 아픔을 펼쳐보는 것
비로소 너를 알아내고 나를 알아가는 것'
(안정옥, '생로병사(生老甁死)' 부분,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에서 (문학동네시인선 099))
어릴 때 양치질을 참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입 안을 감싸는 치약의 향과 맛이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물로 대충 헹군다거나 하여 넘어갈라 치면, 엄마는 양치를 하지 않으면 입냄새가 난다며 억지로 양치를 하게 하셨고, 나는 종종,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또 입냄새가 날 거고 아침도 먹어야 하는데 잠들기 전에 무엇하러 양치를 또 하느냐며 항변하곤 했다. 이에 엄마의 답변이었는지 옆에 있던 형이 거들어 꺼낸 말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럼, 어차피 죽을 건데 살아서 무엇하냐는 말도 할 수 있겠네?" 유년의 나는 유한한 것의 의미와 반복되는 일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유한함과 반복에 대해서는 글을 따로 적어야겠다.)
양치 이야기를 시작한 건 노트북을 펼쳐 이 글을 쓰기 직전에 양치를 하고 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이렇듯 가장 최근의 것, 그러니까 여기서는 가장 최근에 한 스스로의 행동, 에 가까이 머문다. 지금에야 100세 시대도 넘어서 120세, 150세 같은 숫자가 거론되지만 오래 살아도 두 세기를 넘지 못하는 것, 우주 전체의 시간으로 따진다면 정말 먼지만큼의 삶일 것을. 거기에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을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삶은 좁아진다. 이건, '어차피 나는 나고 너는 너인데'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심장의 박동을 들려줄 수는 없을까'
(이사라, '문의 비밀' 부분,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에서 (문학동네시인선 105))
작년 11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신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출간 직후 출판사에서 마련한 강연 행사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이야기 한 대목이 여전히 기억난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를 그는 이렇게 요약했다. "육체라는 경계, 영혼이라는 깊이, 심장이라는 조건." 나는 당신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는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상의 속성을 얼마나 헤아리는지 파악할 수 없다. 내 심장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뛸 수는 없다. 그 말인 즉, 동정과 공감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완전히 성공할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마음이 유리나 거울처럼 투명해서 누구에게나 그대로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내 생각을 언어로, 일대일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고 타인 역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영화를 볼 때 그는 어떤 장면의 무엇 때문에 웃고 우는지, 책을 읽을 때 그가 받은 감동은 어떤 문장의 무엇 때문인지. 그런 것들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음은 안다. 말하거나 표현하지 않아도 내면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말을 하거나 표현을 했을 때 그 진의가 오롯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타인을 자신처럼 그대로 헤아리고 완벽히 공감하는 게 불가능한 건 서로가 자라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겪은 아픔을,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결코 알지 못한다. 아픈 두 사람이 있을 때 서로의 아픔을 비슷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두 아픔을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를테면 자식을 일찍 떠나보낸 두 부모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자식을 잃었다'라는 명제 자체는 같을지라도 각자의 자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고 그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스스로의 일상에서 자녀의 양육이나 자녀와의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두 부모에게 결코 똑같은 것일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혼자의 삶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그 모든 감정을, 배우자가 있음으로 인하여, 그리고 가족을 함께 이루는 과정으로 인하여 알아갈 수 있다. 기쁨과 고통 모두. 친구나 동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디서 읽었는지 그 출처가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데, 인간도 동물이지만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인간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을 읽은 적 있다. 사람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가능성을 대변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출생이다. 이를테면 사슴이나 들소 같은 동물들의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출생 직후의 잠깐의 비틀거림 정도를 제외하면 곧장 뛰어다닐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난 후 일정기간 동안은 부모나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람은 거의 무능력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양육에도 그만큼 노력이 더 필요하게 되고, 아기 역시 처음부터 일정한 지능이나 육체적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 않고 자라면서 그 환경과 주위의 보살핌 등에 따라 저마다 다른 사람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사람은 곧 가능성의 존재라는 이야기. 그 책(그것이 책이었는지도 사실 기억이 안 난다. 인터넷에서 본 어느 뉴스 기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자체가 내게 아주 인상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출처는 잊어버렸지만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을 읽을 때도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 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42쪽에서, 마음의숲, 2012)
사랑의 표현 중 하나지만 연인이 아플 때 상대가 "내가 당신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와 같은 류의 말을 하는 걸 위의 맥락에서 받아들여도 될까. 지금 아픈 당신이 얼마나, 어떻게, 왜 아픈 것인지를 내가 정확히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라고. 그때 우리는 타인에게 이해받기 위해서 아픔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몰랐던 아픔에 대해 하나 더 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꼭 아픔이나 비극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 A라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때, 옆사람은 a도 아니고 B나 C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지극히 기본적인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그래서 어긋나지 않아도 될 것에 어긋나고, 아프지 않을 수도 있을 일에 아프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번 더 생각한다. 타인에 대하여, 자신에게 그러한 것만큼 좀 더 예민해져야 한다는 믿음을, 그리고 세상이 좀 더 타인에게 둔감하지 않은 세상이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2019.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