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타인의 슬픔을 기억하기

책 바깥의 독서일기

by 김동진
하루를 함께한 두 권의 책


어제, 그러니까 4월 16일 하루 동안 찍은 사진은 날짜가 흐릿하게 표시된 민음사 일력이 유일했다. 리스본 독서실에는 신철규 시인의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와 겨울서점에서 추천받은 『미루기의 천재들』을 가져갔다.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과 삶으로 향하고, 나아가 사회와 타인에게로 향한다. 타인의 슬픔을 지겹다고 말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짓누르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예민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둔감했다면 받지 않았을지 모를 상처를 쉽게 입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필요가 굳이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타인의 마음이 그저 소비 대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 자신이 변화하게 될 계기가 생기거나 자신이 직접 어떤 일을 겪지 않는 한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쉽게 절망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기,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의 작은 언행이 누군가에게 닿아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면 어떨까.


직장 상사와 친구 이야기부터 세월호와 대구 지하철 등을 오가며, 오늘도 쉽게 말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한 번 더 생각해보고자 했다. 무엇인가를 잊지 않고 오래도록 생각하기. 그제 본 영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11)의 주인공 '오스카'(토마스 혼)는 9/11 테러로 아빠를 잃었다. 아빠가 세계무역센터 106층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을 1년이 지나도록 이해할 수 없었던 소년은 아빠가 남긴 단서라고 생각한 것을 찾아 뉴욕 전역을 수소문한다.


영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스틸컷


'오스카'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에게 엄마 '린다'(산드라 블록)가 하는 말은 어쩌면 타인의 슬픔에 대해 오직 타인의 타인인 내가 취할 수 있을 바람직한 태도처럼 보였다. "넌 어떻게든 (아빠의 죽음을) 이해해보려고 한 거고, 난 거기에 동행해보려 한 거야." 당신의 슬픔을 외면하려 하지 않으면서, 쉽게 안다고 말하지도 않기. "내가 겪어봐서 알아"라고 말하는 건 무지함이다. 대신 "내가 (널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질문을 건네는 일이 그에게는 정말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것.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책을 한 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에 오는 길인데 집 앞에 철공이가 있었다. 대체로 밤늦은 시간에는 밥그릇과 물그릇만 가만하게 놓여 있기 마련인데 반가운 마음에 눈높이를 맞추려 쪼그리고 앉으니 꼭 다가오는 철공이.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작은 생명을 쓰다듬으며 만져지는 온기가 있는데, 사람의 온기를 잃지 말자는 생각을 작은 고양이를 보면서 하는 밤이다. 서점, 리스본은 늘 옳고 고양이도 옳다. 며칠 만에 철공이를 봐서 기분이 좋단 생각을 하고는 아까 책 읽으면서 쓴 메모를 다시 꺼낸다. 책 얘기를 쓰려고 했는데 책 얘기는 하나도 안 했다. 독서실 모임을 마친 귀갓길에는 늘 책 바깥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네에 사는 고양이 '철공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