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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09. 2019

엄마의 1박 2일

나는 여전히 그런 아들이어서

오전 청량리역. 1호차에서 내린 엄마는 어김없이 양손에 짐을 들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하나를 나눠 들었다. 평소 내 가방이 제일 무거울 때보다 서너 배 가량 무거운 걸 들고 서울과 영주 날씨 이야기를 하며 1호선을 탔다.


엄마는 화장실을 포함한 내 집 곳곳을 살피며 물티슈를 뽑거나 분무 세제를 꺼내 들었다. 냉장고를 살폈고 붙박이장을 열어보았다. 책장의 먼지를 닦기도 했다. 그간 여러 번의 택배를 받은 탓에 수십 개가 넘게 쌓인 빈 반찬통을 되가져갈 수 있게끔 크기별로 나눠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야 점심을 먹었고, 보지 않던 TV를 꺼내 연결했다. 백화점과 마트 구경을 했고, 일일드라마를 보면서 저녁을 먹었으며, [가요무대]를 보면서 소주 한 병과 함께 치킨을 시켜 먹었다. 굽네치킨은 고추바사삭이 더 매운지 볼케이노가 더 매운지 이야기를 했고 이어서 형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는 형이 부모님과의 연락을 더 잘 챙기는 편이라 비교적 사소한 일상들을 많이 공유했다. 반면 나는 묻는 말이 아니면 적극적이고 상세하게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 편이다. 청소를 하면 옆에서 거들고 식사를 하고 나면 상을 치우고.


어린 내 이름으로 십수 년 전에 든 종신보험의 계약자를 나로 바꾸자고 했다. 기존 주계약자(아빠)가 동행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필요한 서류가 많아서 결국 월말에 영주를 방문하기로 했다. 엄마가 청량리역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부터 전화해 몇 호차에 타고 있으니 잘 마중하라고 했던 아빠는 하루 내내 몇 번을 전화해 엄마의 안부를 살폈다.


다음날 오전. 카톡으로 링크를 보낸, [문화가 있는 날] 공식 블로그에 기고한 <어벤져스: 엔드게임> 글을 엄마는 열심히 읽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리 없겠지만 "요즘 그게 그렇게 난리라며"라며 내 글을 정말로 읽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몇 분간 읽고 나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들 계속 (글 써달라고) 불러주면 좋겠구만". 책 『그 영화에 이 세상은 없겠지만』을 만들었을 때 계속해서 책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던 나를 생각했다. 영주로 향하는 무궁화호가 떠나기 한 시간 반 정도 전에 도착해 함께 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기차에 잠시 함께 타 짐을 좌석 위에 올려주고 나는 일상적인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항상 살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으면서 언젠가 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불과 지난달 제주에서도,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의 뒷모습을 느꼈었다. 가족은 묘하고 어렵고 고요하고 뜨겁다고, 재작년 가을 무렵 쓴 적이 있다. 시간은 계속해서 가고 있고 나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합실에서는 쭈뼛거리며 같이 셀카 두 장을 찍었다. 더 환하게 나온 한 장을 엄마한테 보냈다. (201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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