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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29. 2019

진정 모두를 위한 애니메이션은 어쩌면 바로 이런 것

영화 <파리의 딜릴리>(2018) 리뷰

<파리의 딜릴리>(Dilili à Paris, 2018) 리뷰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파리의 딜릴리>(2018)를 통해 미셸 오슬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처음 접했다. 처음에는 실제 사진을 활용한 배경과 캐릭터 작화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보여서 적응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그 정도는 이내 자연스러워졌다. 결론적으로는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할 만한 풍부한 문화적 배경과 그에 담아낸 감독의 의도를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파리의 딜릴리>는 '벨 에포크' 시대라 불리는 1900년대 초반, 즉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을 배경으로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식민지 확대로 인한 부의 축적으로 세상이 낭만과 희망으로 가득해 보이던 시기. 주인공 '딜릴리'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이다. 만국박람회로 추정되는 곳에서 원주민의 생활을 '인간 전시'로 내세우던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애니메이션 치고는)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오프닝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주인공 '딜릴리'. 작중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과 다른 인종을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여겼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설국열차>(2013)나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의 원작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흔히 '아동용'이라는 편견이 익숙한 것과 달리 프랑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날카로운 시대 의식과 메시지를 주저 없이 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파리의 딜릴리> 역시 작중 벌어지는 여아 납치 사건의 배경에 여성에 대한 혐오와 하대가 깔려 있다. 작중 어떤 음모를 꾸미는 집단인 '마스터맨'이 파리 시내의 여자 아이들을 계속해서 납치하는 것의 이유 중 하나로 그들이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것'에 반감을 가졌기 때문.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앞서 간단히 언급한 바, '벨 에포크' 시대는 빛과 어둠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풍요롭고 화려한 예술적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인 동시에, 식민지의 수탈과 착취를 통해 얻어진 본국의 부유함이 그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지만, <파리의 딜릴리>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건 애니메이션으로 담아낼 수 있는 아름다운 작화뿐 아니라 감독의 작가적인 시대의식과 메시지를 담기에 알맞은 배경이기 때문일 것.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무엇보다 <파리의 딜릴리>를 풍요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건 (대부분 조연이나 단역 수준의 비중을 보여주지만) 작중 등장하는 수많은 실존 예술가들이다. 당대의 작가인 가브리엘 콜레트를 비롯해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의상 디자이너 폴 푸아레,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등이 등장한다. (모두가 이름을 알고 있을 '퀴리 부인'이나 '파스퇴르'를 포함) 훗날 에드워드 7세가 되는 영국의 왕자 알버트 에드워드도 등장하는데, (그의 재위 시기 영국에서는 서프러제트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실존 인물들은 단지 시대적 배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딜릴리'의 여정에 직, 간접적인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딜릴리'는 상술한 '여아 납치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주역이 되는데, 이 과정은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추리극 내지는 어드벤처처럼 만들어져 있어 작화를 보는 재미는 물론 이야기로서도 꽤 (성인의 눈높이에도) 흥미롭다. 또한 스스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대의 명암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음이 느껴지는데, 이는 당대를 마냥 아름다운 시대로만 포장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파리의 딜릴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딜릴리'가 파리의 주요 언론에 다뤄진 모습을 다루는 신이다. 각 신문들은 저마다 '딜릴리'를 가십에 지나지 않게 보도하고 있는데, 이름을 틀리게 표기하는 것쯤은 사소한 일이고, 영화 오프닝에 나타난 '원주민 전시'와 다르지 않은 보도 태도를 보여준다. 초반부 '오렐'이 '딜릴리'에게 "프랑스어 할 줄 아느냐"라고 묻는 것이나 '칼베 부인'의 운전기사가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것 등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야기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그것의 기반이 되는 문화적 배경은 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작중 짧게 언급되는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것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지는 않더라도, 폴 푸아레가 코르셋 해방 운동에 기여한 인물임을 이미 알고 있지 않더라도, <파리의 딜릴리>는 벨 에포크의 명암을 충실히 담으면서도 '딜릴리'를 중심으로 진취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적으로는 결말 처리 역시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 결론을 명확히 단언하듯 내리지 않고 관객에게도 이야기의 장을 허용하는 듯한 마무리. 역사는 계속해서 이야기되어야 하고, 좋은 이야기의 하나는 세대를 아울러 많은 이들에게 닿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파리의 딜릴리>는 미셸 오슬로 감독 작품세계의 매력을 느끼기에 적합한 애니메이션이다. 5월 29일 (국내) 개봉, 94분, 전체 관람가.


영화 <파리의 딜릴리> 국내 메인 포스터

*브런치 무비패스 관람(5월 27일, 대한극장)

*<파리의 딜릴리> 예고편: (링크)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 7/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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