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만난 영화와 이야기
브런치 계정을 운영하면서 감사하게도 서울환경영화제에 2017년부터 매년 초대를 받고 있다. 제14회(2017) 때는 프레스 ID를 발급받았고, 제15회(2018) 때는 티켓 교환권을 받았다. 올해, 제16회에는 일종의 기자단 혹은 서포터즈 격이라 할 수 있는 '세프터즈' 활동 기회가 주어져 주요 프로그램 및 이벤트, 상영작 등 영화제 정보를 갈무리하는 글들을 브런치에 작성했다. (브런치 내 '그 영화에 이 세상은 없겠지만' 매거진으로 업로드. 본문 아래에 링크를 모아둘 것이다)
죄송하게도 매년 한두 편의 영화밖에 관람하지 못했다. 일차적으로는 시간적, 물리적 한계 때문이겠으나 이차적으로는 당면한 일들 사이에서의 내 우선순위 안배의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매년 '내년에는 영화를 더 많이 봐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매년 그러지 못했고, 올해의 서울환경영화제는 개, 폐막식을 모두 참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겨우 상영작 두 편을 간신히 관람했다. 열심히 소개하고 정작 본인은 온전히 영화제를 둘러보고 누릴 수 없었다면 그건 내게 유의미하지 못한 경험인 걸까.
그러나 그렇게 간신히 챙겨본 두 편의 영화는 다행하게도 정말 좋은 작품이었다. 특히 최근 두어 해 동안 극장과 넷플릭스를 통해 여러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나고 있는데, 극영화가 전하기 어려운 고유의 영역, 오직 다큐멘터리만이 담아낼 수 있는 미학과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하여 이번 제16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만난 두 편에 대해 짧게 덧붙인다. 두 영화 사이에 꽤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기도 한데, 둘 모두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movie)나 예술적 영화(film)가 아니라, 세상의 거울로서의 영화(cinema)의 영역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내년에도 온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도 모를 나름의 기약을 그럼에도 해둔다. 다음 환경영화제에서 더 많은 영화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우리가 '자연'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거기에는 많은 경우 '인간 세상'과 '인간 세상 밖'을 구분 지으려는 의식이 담겨 있다. <비커밍 애니멀>은 국립공원에서 만난 동물들, 그리고 '대자연'이라고 표현해야만 할 어떤 압도적인 풍광과 함께 결국 인간이 자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일깨운다. 울창한 숲을 적시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는 스크린을 뚫고 정말 공원에, 숲에 다녀온 듯한 체험을 선사하고 어두운 밤 무스와 무스가 서로의 뿔을 부딪히는 소리는 일상에서 결코 만날 수 없는 생경한 자연을 만나게 한다. 영화 전체를 포괄하는 테마는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언급된다. "자유의지와 사고력을 가진 인간이 두뇌를 통해 몸을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말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사유보다 본능이 행동을 좌우하므로, 곧 '몸 전체로 사고하는' 존재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인간만이 대단한 피조물인 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계를 생각하고 자연을 마주하는 경이로움을 잊지 않을 때 진정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유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
*(5월 27일 17:00, 서울극장 H관)
지하철이나 수도관, 터널 등과 같이 본래 땅 아래에 있는 공간을 카메라에 담아낸 작품. 현대인의 일상에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그 실체 혹은 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굳이 인식하지 않은 채로 늘 함께하는 지하 공간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예: 지하철이 지상에 있지 않을 때, 창밖을 보면 그저 스스로와 사람들이 반사되어 보이는 어둠 속이지만 그곳에는 지하철을 움직이게 하는 구조들이 있다.) 극히 드물게 등장하는 인간의 언어는 대화라기보다는 기호처럼 쓰이고, 찬찬하고 긴 호흡으로 오로지 지하 세계 곳곳을 지도나 설계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모험하듯 누빈다. 감독은 극도의 어둠을 공포라기보다 마치 원시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매개체처럼 여기는 듯한데, 거시와 미시를 모두 아울러 그가 포착한 지하 세계의 풍경은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살게 하는 수많은 것들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든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언급했다. 찾아보니 이는 '주어진 사회 공간에서 발견되지만 다른 공간들과는 그 기능이 상이하거나 심지어 정반대인 단독적 공간'으로, 주로 '유토피아'에 대비되는 개념이라 한다.
*(5월 29일 16:00, 서울극장 10관)
티켓 교환권과 더불어, 서울환경영화제로부터 받은 세프터즈 활동 리워드. 화학재를 최소화 한 발효성분 화장품, 지난 영화제의 폐현수막으로 만든 카드지갑부터, 재생 플라스틱으로 만든 칫솔(재생용지로 만든 포장재에 담긴)까지.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이 줄어들수록 이 세상의 폭은 넓어진다.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글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이라면 그 글은 분명 그에게 영향을 주는 글이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쓴다. 브런치에 몇 편의 글을 발행하는 게 영화제에 얼마만큼의 기여가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나 하나의 존재가 이 영화제에 어떤 역할을 했다는 건 무의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여전히 환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게,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접하게 해주는 영화의 존재는 그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가 없다면 결국 '나'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 오늘도 내가 공부하고 알아가야 할 세상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는 걸 실감한다. 이번 세프터즈 활동으로 내 이름은 영화제 폐막식의 엔딩 크레딧에 기재되고, 환경부에서 주최하는 제2회 환경 단편영화 공모전 [숨:]의 시사회도 초청을 받는다. 영화 한 편의 값, 글 한 편에 들어가는 시간만으로는 산출할 수 없는 가치가 영화에 있고 환경, 곧 세상에 있다. (2019.05.27.)
앞서 더 많은 영화제 상영작을 관람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언급했지만, 지난 두 해의 경험보다 올해 환경영화제는 내게 훨씬 더 각별했다. 막연히 플라스틱 사용과 같은 단편적 이슈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으로 '나와 환경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경험이었다는 뜻이다. 특히 <비커밍 애니멀>보다도 <히든 시티>를 통해 느낀 생각들은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지하철, 보도를 걷다가도 익숙하게 마주치는 맨홀, 거주 공간의 곳곳에 자리해 있는 상하수도와 같은 것들. 잘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내 주변에 어떻게 자리해 있으며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인 동시에, 훌륭한 사운드와 이미지로 관객을 지하 세계로 생생하게 인도하는 '체험'의 영화이기도 했다. (2019.05.29.)
P.S.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안락한 '환경'에 길들여진 내게, 서울극장은 대한극장과 마찬가지로 시사회 같은 일이 아니면 거의 찾을 일이 없는 공간 중 하나다. <히든 시티> 상영 및 관객과의 대화를 함께한 서울극장 10관은 작지 않은 관이지만 규모에 비해 좌석 수가 적은 편이었다. 앞뒤 좌석 간격이 거의 일반적인 극장의 두 배 이상 넓었기 때문. 언제나 마음처럼 되지만은 않지만 평소에 잘 찾지 않는 극장을 방문할 때면 익숙한 공간과 낯선 공간이 주는 경험의 차이를 늘 생각하게 된다. 내년의 제17회 서울환경영화제도 이곳 서울극장에서 열리게 될까? 제16회 서울환경영화제의 기록은 여기까지 남겨두고 마쳐야겠다.
*제16회 서울환경영화제 지난 글들
1. '환경, 곧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링크)
2. '서울환경영화제와 함께하는 5인의 에코프렌즈 소개': (링크)
3. '제16회 서울환경영화제 주요 상영 프로그램 및 기대작들': (링크)
4. '기후변화와 채식의 관계를 살펴보고 돌아보는 자리':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