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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01. 2019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아는 영화

영화 <소수의견>(2015)

(과거에 작성했으나 브런치에 업로드 하지 않았던 글을 옮겨둡니다.)



냉철한 이성과 사실에 근거한 판단력을 요구하는 형사 사건을 다루면서 영화가 스스로 감정에 매몰되어 버릴 때, 전하고자 하는 바는 희석되고 무언가를 강하게 전달코자 했다는 목소리의 크기만 남는다. <소수의견>은 그 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비껴간 뛰어난 대중영화다.


사건 발발 후 그 배경의 불확실한 암연을 훑어주는 극 초반의 전개는 빠른 장면 편집과 함께 설명의 상당량이 대사로 처리되어 자칫하면 흐름을 놓칠 만큼 정보량이 많다. 그러나 <소수의견>을 보면서 사건에 대한 정보들을 굳이 하나하나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은, 결국 영화가 도달하는 착점이, 이 영화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가장 조심스럽고 사려깊게 바라봐야 할 어떤 두 인물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인물이 나누는 정서는 관객이 쉽게 예상하기 어렵도록 고안되어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법정 드라마로서 <소수의견>은 단순히 A가 옳거나 B가 옳다고 이분화할 수 없는 사건을 두고 양측의 엇갈리는 주장을 흥미롭게 다룰 줄 알면서도, 시종 (재판장처럼) 불필요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은 채, 다소간 과하게 여겨질 만큼의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도입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현명하게도 한쪽을 피해자로서 극도로 정의롭고 순수하게 묘사하지도 않으며 그 반대 입장을 양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타락한 권력으로서 바라보지도 않는다. 홍제덕(김의성) 역시 다소 일그러졌지만 국가관과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양심과 진실, 그리고 둘을 바라보는 직업적 신념과 (일종의 속물로서의) 날것의 인간성 사이에서 변화하거나 깨달음을 얻는 캐릭터들은 모두 (일종의 능력치나 도덕성의 0부터 100까지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영화적이지 않고 현실의 인물로서 친화력 있게 다가간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공수경(김옥빈)의 캐릭터가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단면으로서) 피상적으로 비춰지고 다뤄지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녀의 활용에 있어서도 다소 기능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견>의 수많은 장점들은 그 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비슷한 신(Scene)에서 웃음 짓고 중요한 순간 함께 숙연해지는 광경을 보는 것은, 이 영화가 실화거나 다큐가 아닌, 소설을 기반으로 한 연출로서의 극영화임을 감안할 때 누구에게든 숨은 보석처럼 박혀 있는 공통된 정서를 잘 끄집어내어 '그 영화'와 '이 세상'의 두 이야기의 간극을 훌륭하게 좁혔다는 점을 돌이켜보게 만든다.



결국, 오래도록 경시받아왔던 극소수의 의견은 그것이 조명되어 다수의 의견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회가 피라미드처럼 소수와 소수 간의 장력과 이해관계에 의해 누군가의 희생과 또 다른 누군가의 봉사를 발판 삼아 존속해왔다는 점을 <소수의견>은 놓치지 않았다. 크랭크업 후 개봉하기까지 2년이 걸렸지만 현재의 순간을 담아 생중계하는 것 같은 몰입감을 잃지 않는다. 절망적이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은 오늘로서 말이다. (201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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