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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10. 2019

영화 '틴 스피릿'이 자신의 주제와 이야기를 담는 방식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본 글의 내용은 6월 5일(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제가 진행한, 영화 <틴 스피릿>의 키노라이츠 GV 행사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당연히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으며, 구어를 문장으로 옮긴 특성상 문단 간 연결은 일부 매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01. 영화에 대한 총평


<틴 스피릿>이 예를 들자면 플롯이 너무 복잡하게 짜여 있어 집중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내용의 영화라거나, 누군가의 해설을 듣지 않으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종류의 영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틴 스피릿>은 오디션 소재의 음악 영화로서 누구에게나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해드릴 만한, 부담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귀에 익숙하거나 잘 와 닿는 곡들이 많이 나오고, 모든 노래를 라이브로만 소화한 엘르 패닝의 연기도 굉장히 좋다.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02. 엘르 패닝의 노래


보통 레이디 가가 같은 가수의 연기가 아닌 이상 후시 녹음이나 기타 보정 작업 등을 어느 정도 하는 경우가 많다. (본 영화와 완전히 직결되는 예는 아니지만, 최근작 중에서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미 말렉이 생각나는데, 프레디 머큐리의 음성과 비슷하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였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들리는 게 실제 라미 말렉의 음성 그대로가 아니다.) 우선 엘르 패닝은 배역을 위해 몇 달 동안 보컬 트레이닝을 따로 받았는데, <틴 스피릿>의 경우를 말하자면 물론 실제로 오디션에도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참가자가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바이올렛이 노래에 아무리 소질 있다고 해도 그의 목소리가 데뷔 10년 차쯤 되는 프로 가수처럼 들리는 건 여러모로 어색할 것이다. 영화에서 들은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실제 엘르 패닝의 목소리 그대로라고 보면 된다. 촬영 중에는 엘르 패닝 본인이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고 캐릭터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현장에서 부른 것을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또 엘르 패닝은 사운드트랙의 바탕이 된 케이티 페리 등 아티스트들의 공연 실황 역시 적극 참고했다고 한다.)



03. 배우 맥스 밍겔라의 감독 데뷔작


이 영화는 배우로 활동 중인 맥스 밍겔라가 직접 연출과 각본을 맡은 감독 데뷔작이다. 맥스 밍겔라는 이미 2016년에 <나인스 라이프>라는 영화의 각색을 했고, (연출은 처음이지만 시나리오는 한 번 써봤다는 것) 배우로서 출연한 작품이 스물다섯 편 정도 되는데 (IMDB 출처) 국내에 잘 알려진 영화는 많지 않다. 국내 관객들에게 제일 익숙하다고 할 만한 건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2010)에서 마크 저커버그와 페이스북의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소송을 하게 되는 윙클보스 형제의 친구인 '디브야' 역이다.


그리고 맥스 밍겔라는 아버지가 영화감독이고 어머니가 안무가다. 흥미로운 건 바이올렛을 연기한 엘르 패닝은 미국인인데, 정작 맥스 밍겔라 감독 본인이 영국 태생이다. 아버지가 영화의 배경이 된 와이트 섬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계 영국인이다. 어머니는 홍콩 사람인데 이 어머니의 아버지가 유대계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유럽 계통이다. 맥스 밍겔라 본인이 이민자는 아니지만 가족이 영국 외의 여러 계통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04. <틴 스피릿>이 영화로 탄생하기까지


<틴 스피릿> 제작 이전으로 들어가면, 맥스 밍겔라는 이 영화의 각본 초고(드래프트)를 이미 2009년에 썼다고 한다. 이 영화의 프리미어가 작년 토론토국제영화제였는데, 영화제 당시 진행했던 관객과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본인이 팝 뮤직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고 팝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현장에서 그는 자신이 BTS 콘서트에도 다녀왔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 쓰인 선곡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 텐데, 전적으로 감독 본인이 고른 노래들이 대부분이고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일차적으로 맥스 밍겔라 본인의, 말하자면 팝 취향 덕질 리스트인 것.


아무튼 2009년에 초고를 이미 쓰긴 했지만 영화화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다가, <라라랜드>의 제작자로 참여한 프레드 버거와 음악 담당을 한 마리우스 드 브라이스가 참여하고, 그리고 맥스 밍겔라 감독의 절친인 배우 제이미 벨과 서로 이 기획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제이미 벨 역시 제작자로 합류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제작 과정이 시작되었다. (제이미 벨은 최근 <로켓맨>을 비롯해 <님포매니악>, <설국열차>, <제인 에어>, <킹콩>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05. <틴 스피릿>의 전반적인 구조


<틴 스피릿>은 공간적으로는 와이트 섬(잉글랜드 남부, 인구 약 14만 명, 면적은 우리나라 섬 중에선 거제도 정도랑 비슷)에서 런던으로 가는 이야기. 내용적으로는 바이올렛이 팝 음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게 되는 이야기, 부가적으로는 영화에서 설정된 바이올렛의 집안이 폴란드 이민자 집안인데, 섬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변방을 뜻하기도 할 텐데 이 변방에서 영국의 주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런던에 진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인기 오디션 프로에서 우승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영국인'으로 지명도를 얻게 되었다는 것)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06. 영화의 장면들에 기반한 해석들


일단 영화의 첫 장면은 버스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바이올렛의 모습이다. 이어폰으로 듣는 건 물론 공공장소니까 당연한 에티켓이기도 하지만, 이를테면 집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시끄럽게 메탈 음악을 틀어놓는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인 모습이라 그 자체로 주인공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하고 싶은 활동을 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억눌려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걸로도 볼 수 있다. 이후에 나오는, 방 안에서 혼자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하는 장면과도 대조적이다.


그 다음이 손님이 별로 없는 동네 라이브 바에서 노래를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뒤에 조력자 역할을 하게 되는 블라드(즐라트코 브릭, 크로아티아계 덴마크 배우, 데뷔한 지 40년이 다되어가는 베테랑 배우)가 바에 손님으로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라이브 바 장면은 블라드와 서로 안면을 트는 장면이기도 한데, 그것보단 바에서의 공연이 끝나고 난 뒤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블라드가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는데 바이올렛은 집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머리를 묶고 하의를 바지로 갈아입고 들어간다. 라이브 바에서 노래한다는 걸 집에 숨긴다는 뜻이다. 실제로 집안에서 엄마가 어디 갔다 이리 늦게 오냐 하니까 바이올렛은 친구 집에서 숙제를 하고 왔다고 하는데, 엄마의 답이 대략 이런 내용이다. "그렇게 노래가 좋냐. 노래가 좋으면 성가대 활동이나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것. 그 말은 엄마도 바이올렛이 뭘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안다는 뜻이다.


보통의 음악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공의 가족은 직접적으로 조력자 역할을 하기보다는 그저 뒤에서 모르는 척 응원해주거나, 직접 반대하지는 않지만 아예 신경을 안 쓰거나 하는 모습이 많다. 바이올렛의 엄마 마리아 역시 그런 역할이고, 여기서는 딸이 섬을 떠나 런던으로 가는 과정을 그저 지켜보고 나중에는 연락하라고 휴대폰까지 사주고 오디션 생방송을 교회 사람들이랑 같이 볼 만큼 응원해주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자라난 섬을 떠나 런던으로 갔기 때문에 바이올렛이 가족과 지역사회 사람들을 떠났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07. 바이올렛과 블라드의 관계


다른 장면 이야길 하자면 첫 장면도 그렇고 영화에서 버스 타고 음악 듣고 있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마지막 장면도 버스에서 음악을 듣는 모습으로 끝난다. 바이올렛이 ‘틴 스피릿’ 오디션을 알게 되는 것도 버스 안에서 창밖의 옥외 광고를 발견하면서다. 그 뒤에 학교에서 친구들이 서로 오디션 얘기하는데 바이올렛 너도 나갈 거냐고 하니까 그때는 살짝 모호하게 답변을 얼버무린다. 그렇지만 오디션에 나가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 그런데 열일곱 살이라 보호자가 필요해서 당연히 가족이 아니라 블라드한테 부탁해 (사실 스물한 살이 아니라 나이를 속였다며) 그를 보호자로 데려가는데, 틴 스피릿 오디션을 접수하는 직원이 자기 부모님이 오페라를 좋아한다고 블라드를 알아보는 재미있는 장면도 있다.


보통 주인공을 볼 때는 일차적으로 그의 외모나 연기력 같은 게 눈에 들어오겠지만 결국 그의 이야기에 동화된다. 그러나 조연을 볼 때는 그 캐릭터 본인의 서사보다는 주인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음악영화가 아니더라도, 일부러 그렇게 설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보통 주인공의 친구나 조력자 캐릭터가 외모적으로 좀 눈에 띄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블라드가 한때는 잘 나가는 오페라 싱어였지만 은퇴 후에 딸과도 떨어져 살면서 한적한 동네에서 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이 사람에게 화려한 과거가 있었다는 걸 부각하는 역할도 한다.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08. '틴 스피릿' 오디션 시작 이후의 전개에 관하여


그리고 이제 이 예심에서부터 이후 중요한 장면들이 아주 많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일단 대기실이나 분장실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바이올렛만 유일하게 화장을 고치거나 립을 바르거나 하지 않고 그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 뒤에 본선 무대에서도 바이올렛은 대기실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거울 보면서 하는 일이 많이 다르다. 물론 마지막 결선 무대에서는 의상과 분장을 오디션 제작진이 신경을 많이 써주지만, 그 외에는 바이올렛 본인이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그리고 오디션 전후로 혼자 방 안에서 노래를 듣고 그 노래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또 클로즈업을 많이 써서 보여준다. 이미 이 바이올렛이라는 캐릭터는 이를테면 고등학생 인물을 볼 때 흔히 나올 만한, 연애를 하거나 외모를 가꾸는 것보다, 노래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오디션 자체에만 집중하는 메인 플롯이 이 영화가 별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게 장점이기도 한 것 같다. 첫 예심을 통과하고 나서 이제 런던으로 가기 전의 지역 예선의 본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때 직원이 바이올렛한테 "음악 가져왔어요?"라고 묻는다. 바이올렛은 “네, 아이팟에 넣어왔어요”라고 답하는데, 음악을 가져왔느냐는 이 질문은 사실상 "당신, 할 이야기 가져왔어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거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반드시 자작곡이고 싱어송라이터여야만 '음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 게 아니라 기존에 있는 유명한 팝 음악이라고 해도 그걸 자신만의 색깔과 목소리로, 무대로 만들면 그게 자기의 이야기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또 잘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렬함과 그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09. 블라드의 역할


이 영화에서 블라드는 영화적으로는 꽤 개그 캐릭터적인 면도 많이 보이지만 바이올렛의 일종의 멘토 역할을 훌륭하게 한다. 이를테면 바이올렛의 엄마를 찾아가서 아티스트와 매니저의 수익 배분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라든지, 아까 예심 때 직원이 옆에 분은 누구냐 하니까 바이올렛은 삼촌이라 답하지만 블라드는 스스로를 매니저라고 소개한다. 예선 때 엘리 굴딩의 'Dancing On My Own'를 부르고 나니까 심사위원이 한마디 한다. 음역대가 다양한 곡을 골랐어야 한다는 둥. 이어서 심사위원이 바이올렛의 보호자도 무대로 올라오게 한 뒤, 비슷한 이야길 한 번 더 한다. 거기서 바이올렛은 알았다고 답하고 블라드는 ‘준비시키겠다’("I'll make sure she's ready.")라고 답한다. 그 후에 정말로 블라드가 오페라 싱어로서의 자기 노하우를 살려서 바이올렛에게 여러 가지 조언과 호흡 및 보컬 트레이닝을 해준다. 여기서 마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굉장히 명대사들을 많이 전해주신다. "과거 생각은 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자"라거나, "무대에 서면 네가 드러나는 거야. 사람들에게 들리는 건 목소리지만 보이는 건 네 영혼이야"라든가.


그리고 아마 영화를 보면서 바이올렛이 오디션에 우승하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결선 무대 이후에 최소한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한 관객은 거의 없을 거다. 다만 일종의 영화적 재미 내지는 몰입도를 위해 중간에 결선 진출을 한 번 좌절시키는 대목이 있다. 지역 예선 Top 3에 들었지만 '엔젤 X'에 밀려 2등을 해 결선 진출, 즉 런던 진출에 실패하는 건데, 여기서 셋을 보면 바이올렛만 자기 본명을 쓰고 나머지는 '엔젤 X', 그리고 '엑스트라 테레스트리얼' 즉 E.T.다. 보통 예명이나 가명은 본명이 약간 촌스럽거나 아니면 자신의 예술적인 뜻을 담아서 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렇다고 예명을 쓰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당당한 이름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 응원을 보내는 영화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10. 블라드가 해주는 오페라 이야기의 의미


다시 블라드 얘기를 잠깐 더 하자면, 블라드는 단지 전직 오페라 가수라는 점 때문에 바이올렛의 매니저를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적으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블라드가 과거에 오페라 무대에서 연기했던 '핑커톤' 이야기를 해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게 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인 <나비부인> 얘기다. 핑커톤은 미국의 해군 장교인데 일본 파견 근무 중에 현지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서 케이트라는 여인과 몰래 또 결혼을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 결혼한, 그 첫 부인이 나중에 그걸 알게 되고 결국 자살을 한다는 이야기를 블라드가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연기한 핑커톤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덧붙이는 말이 "자기 잘못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뉘우칠 용기가 없었던 인물"이라는 얘기다.


결국은 이 얘기를 바이올렛한테 하는 건,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라는 게 있다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는 얘기일 텐데. 핑커톤도 그러지 못했고 자기도 아마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일 거. 나중에 기차역에서 딸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 건 바이올렛의 영향을 받아 자기도 용기를 냈기 때문일 것이고.


아무튼 바이올렛이 그 얘기를 듣더니 자기도 일전에 엄마의 외도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작중에도 그 외도로 추정되는 인서트 숏이 잠깐 들어가 있다. 바이올렛은 아빠 없이 살고 있는데 엄마의 언급에 따르면 아빠가 집을 나갔고,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 오페라 얘기는 블라드가 바이올렛의 '유사 부모' 역할을 하는 바탕으로도 볼 수 있지만 서로가 노래만이 아니라 인생 스토리에 있어서도 연결점이 있다는 면에서 중요해 보인다. 아무튼 바이올렛이 엄마 외도 이야길 하니까 블라드가 "그게 오페라야"("That's the opera.")라고 답한다. 후반에 바이올렛의 마지막 무대 전에 실제로 오페라 곡이 하나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삶이라는 뜻이다.



11. 와이트 섬을 떠나 런던으로


원래 와이트 섬 지역 예선에서 1위를 해 결선에 진출하기로 돼 있던 '엔젤 X'가 가명을 썼고 과거 다른 대회 출전 경력을 숨긴 점이 드러나 실격 처리되고 드디어 바이올렛이 런던에 진출하게 된다. 런던에 가기 전에 엄마는 행운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며 아빠의 목걸이를 전해주는 장면이 있고, 중간에 'Little Bird'라는 노래가 삽입돼 있는데 이 노래 가사를 보면 화자가 새인데 멀리 날아갈 날개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앞서 제가 이 영화가 공간적으로는 섬을 떠나 런던, 즉 본토로 떠나게 되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이제 가족을 포함한 섬 사람들은 오로지 TV를 통해서만 무대를 지켜보게 되고, 즉 무대 바깥에 있게 되고 여기서부터 온전히 '바이올렛'만의 무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폴란드에서 영국으로 이민을 온 건 영화에서 정확히 시기가 언급되는 건 아니지만, 십수 년 된 걸로 추정할 수 있고 그건 바이올렛의 부모가 한 일이지 바이올렛 자신이 결정한 건 아니지 않은가. 이 영화에서 이민자라는 테마는 거의 서브적으로만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섬마을을 떠나 런던으로 떠나는 것 자체가 제가 지방을 떠나 서울로 온 것과 같은 개념이고, 이전 세대로부터 벗어나 자기 세대, 곧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에 보너스처럼 바이올렛의 인터뷰가 잠깐 삽입되는데 리포터가 "틴 스피릿 오디션으로 뜨거운 한 해를 보내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냐"라고 묻는다. 정작 바이올렛이 뭐라고 답변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건 누군가에게, 즉 시청자들에게 제가 이런 활동들을 하고 이런 길을 갈 거니까 예쁘게 잘 지켜봐 주세요,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누가 뭐라든, 누가 지켜보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라는 일종의 영화적인 선언처럼 다가온다.


어떤 면에서는 각본 자체가 그리 깊이감이 있지 않은 걸로도 볼 수는 있는데,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이라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틴 스피릿’ 오디션이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하다못해 중간에 음반 계약을 제안하는, 레베카 홀이 연기한 줄스라는 사람과의 이야기조차도 바이올렛과 블라드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데에만 쓰인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건 창의성이나 혹은 예술적 성취를 약하게 만드는 것도 되겠지만, 신인 감독답게 안정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좋게 보았다.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12. <틴 스피릿>의 사운드트랙에 관하여


일단 사운드트랙 순서상으로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틴 스피릿 오디션의 주요 관문마다 삽입되어 있거나 바이올렛이 부르는 노래를 보면 영화 밖에서 실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메가 히트송부터 시작해 조금씩 인디에 가까운 싱어송라이터의 곡으로, 말하자면 원곡 혹은 그 노래를 부른 아티스트의 인기도가 조금씩 내려가는 순서로 선곡이 되어 있다.


먼저 케이티 페리(Katy Perry)의 'E.T.'라는 곡이다. 간단히 춤 실력과 발성 정도를 보는 첫 번째 예심에서 거의 가사 없이 배경음악으로만 삽입돼 있는데 이 곡은 케이티 페리의 2010년 발매된 2집 정규앨범인 'Teenage Dream'의 수록곡이다. (앨범명부터 틴에이지 드림!) 1집도 물론 잘 됐지만 이 2집이 케이티 페리 앨범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앨범으로 꼽힌다. 게다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다섯 곡이나 배출한 앨범이기도 한데, 영화에 쓰인 'E.T."를 비롯해 'California Gurls, Teenage Dream, Firework, Last Friday Night' 이렇게 다섯 곡이다. 그리고 케이티 페리는 원래 팝스타이기 이전에 가스펠 가수였다. (바이올렛이 오디션에 나가기 전 성가대 활동을 한다는 점과 유사하다.)


지역 예선 무대에 서기 전에 삽입된 'Dancing On My Own'은 스웨덴의 싱어송라이터 로빈(Robyn)의 노래인데 케일럼 스콧(Calum Scott)이 2015년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이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다.


다음은 지역 예선에서 바이올렛이 부르는 엘리 굴딩(Ellie Goulding)의 'Lights'라는 곡이다. 엘리 굴딩은 영국의 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인데 2010년 첫 정규 1집 앨범의 타이틀이 'Lights'이고 이 곡이 빌보드 2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엘리 굴딩의 노래는 굉장히 여러 영화에서 OST나 삽입곡으로 나오는데 제가 엘리 굴딩을 좋아하기도 하고 작년에 내한공연도 갔었다. 그래서 반가웠던 선곡 중 하나.


바이올렛이 결선에서 부르는 'Don't Kill My Vibe'는 노르웨이의 싱어송라이터인 시그리드(Sigrid)의 곡이다. 시그리드는 영국 BBC에서 매년 선정하는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 명단인 'Sound of 2018'에서 우승을 했다. 참고로 이 Sound of 2018에 후보로 요즘 핫한 빌리 아일리시도 있었다.


다른 곡들도 일부 소개하자면 맨 처음 라이브 바에서 부르는 곡 'I Was A Fool'은 캐나다의 인디 듀오인 테건 앤드 사라(Tegan and Sara)의 곡. 지역 예선 1위 하고 나서 바이올렛이 런던으로 가기 전에 삽입된 'Little Bird'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가수인 애니 레녹스(Annie Lennox)의 곡이다. 애니 레녹스는 1980년대부터 활동한 굉장히 관록 있는 중견 가수이고 사회운동에도 많이 참여해 2011년 대영제국 훈장을 받기도 했다. 결선에서 참가자들이 함께 부르는 'Good Time'은 칼리 레이 젭슨(Carly Rae Jepsen)과 아울 시티(Owl City)의 곡. 칼리 레이 젭슨은 캐나디안 아이돌 Top 3로 데뷔했다. 이처럼 단지 인기곡들을 나열한 게 아니라 노래 자체를 오디션과, 그리고 바이올렛이라는 캐릭터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곡들로만 선별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사운드트랙이다.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13. <틴 스피릿>을 보며 어렴풋이 <스타 이즈 본>을 떠올리다


'<라라랜드> 제작진'으로 마케팅 자료들에도 쓰이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생각난 영화는 사실 브래들리 쿠퍼의 <스타 이즈 본>(2018)이었다. 그 영화는 이미 두 차례나 리메이트 된 1934년 영화를 기반으로 오리지널 송을 전부 작곡해 만들었는데 이야기 자체는 과거에 만들어졌던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브래들리 쿠퍼의 감독 데뷔작이자 브래들리 쿠퍼가 각본과 음악에도 직접 참여한 영화였다. 개인적으론 극장에서만 네 번을 보고 블루레이도 살 만큼 좋아했는데 대외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기도 하다.


맥스 밍겔라의 <틴 스피릿>은 대부분 기존에 있는 팝 음악들을 활용했고 스토리 자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음악 영화를 거의 벗어나지 않지만 감독이 10년 전부터 구상한 이야기를 자기가 연출하고 시나리오를 써서 직접 실현한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 바이올렛 역시, 외모를 화려하게 가꾸거나 혹은 유명한 스타가 되는 목적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한다'라는 과정 자체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거기에 열중하는 캐릭터다.


과연 좋은 이야기,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하자면, 완전히 독창적이고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있는 이야기여도, 기존에 이야기되었던 이야기라 해도 그것을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자신의 어떤 소신이나 주관을 담아 만들면 그게 바로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스타 이즈 본>에도 그런 대사가 있다. "음악이란 12개 음을 가지고 옥타브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방식대로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이라고. 바이올렛이 결승 무대에서 부른 노래에도 "난 어려, 마음대로 해, 그만두지 않아. 내 걸음을 막지 마."라는 가사가 있다. "두려워하던 나는 이제 여기 없어"라는 가사도 있다. 예선에서 불렀던 곡 'Lights'에는 "당신이 보여준 빛 때문에 난 더 강해질 거고 꿈을 꿀 거야"라는 가사도 있다. 기존에 있던 유명한 노래라고 해도 이걸 바이올렛이 부르면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기존 곡을 그대로 삽입만 한 게 아니라 엘르 패닝이 직접 불렀고, 영화의 제작진이 편곡한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실제로 엘르 패닝은 오래전부터 노래를 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그런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없었고, 독특하게도 이 영화는 캐스팅이 되지 않은 상태로 제작 발표를 먼저 했는데 그걸 보자마자 엘르 패닝이 '아 이건 내가 해야겠다' 싶었다고 한다.


<틴 스피릿>은 특별히 작가적인 야심이나 욕심이 별로 없어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9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이를테면 오디션을 소재로 다룰 법한 '쇼 비즈니스 세계의 명암'이라든가, 멘토로 나오는 '블라드'의 과거라든가. 아니면 주인공 '바이올렛'의 연애담이나 우정 혹은 바이올렛의 가족에 얽힌 얘기 같은 것은 메인 플롯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아까 얘기한 브래들리 쿠퍼도 마찬가지고 <틴 스피릿>의 맥스 밍겔라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만약 이 사람들이 한창 배우 하다가 (물론 지금도 배우지만) "아 감독이나 해볼까?" 하고 기성 시나리오 작가의 시나리오 하나 받아서 연출 조금 배워서 적당히 만들었으면 아마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자기 이야기가 아닌 거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일단 맥스 밍겔라 본인이 팝 뮤직을 사랑하는 덕후이고, 그걸 친구랑 같이 얘기하다가 야 우리 이거 진짜 한 번 해보자 하고 의기투합해 즐겁게 만들어낸 것이다. 대신에 나는 연출을 처음 하는 사람이니까 예술적, 작가적 욕심보다는 기존에 대중들이 많이 봐왔던 상업영화의 포맷을 따라서 한 번 해보자, 라는 것일 테고. 그게 이 <틴 스피릿>인 것 같다. 실제로 본인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자기가 시나리오를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다듬느라 시간을 오래 들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엘르 패닝은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오히려 폴란드어 대사를 소화하는 게 더 어려웠다고도 밝힌다.)



14. 영화의 결말에 관하여


앞서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간단하게만 얘기했는데, 바이올렛이 물론 오디션에서 우승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예를 들면, 정말 예를 들자면 영화에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럴 일은 없어 보이지만 과거에 섬의 일진이었다든가, 아니면 이후 폴란드와 영국 사이에 어떤 외교적인 문제가 될 만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미 영국에서 스타가 된 폴란드계 가수인 바이올렛이 거기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해서 그게 문제가 된다든가. 아니면 그런 거 다 떠나서 오디션 우승은 했지만 그때만 반짝하고 나중에 장기적인 성공은 이루지 못한다든가.


그러나 영화가 이미 작년 틴 스피릿 우승자인 키얀 스피어스라는 캐릭터를 통해 어쩌면 바이올렛은 그렇게 되진 않을 거라는 복선 같은 걸 하나 깔아 둔 것 같다. 적어도 영화에서 다뤄진 키얀을 보면 가수로서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보다는 그저 술 유흥, 그리고 여자에 취해 있는 모습으로 많이 다뤄진다. 지금까지 소개한 영화의 사운드트랙과 그 가사의 내용들, 그리고 블라드라는 캐릭터의 역할과 바이올렛이 보여준 음악에 대한 애정, 그런 것들은 결국 영화 <틴 스피릿>이 '바이올렛'이 '틴에이저의 스피릿'을 잃지 않기를 응원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좋은 뮤지션이 되리라는 희망을 깔아 둔 채로 결말을 맺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 <틴 스피릿> 국내 메인 포스터

*<틴 스피릿> 예고편: (링크)

*<틴 스피릿> 영화 정보: (다음) (네이버)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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