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을 생각하며
제출해야 하는 글과 준비해야 하는 말들로 하루를 보내느라 책상에 한가득 쌓아둔 책들은 하나도 펼치지 못했다. 글 작업은 아직 다 마무리하지 못했고 GV 준비도 물론 마치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틀어두기로 했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2016)은 여러 번 되풀이해서 볼수록 그 의미가 생생해지고 깊어지는 걸작이다. 영화의 도입에 슬쩍 제기되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본인을 향한다. 가족으로부터, 옛 제자와의 논쟁으로부터, 그리고 평생을 바쳐온 직업과 연구로부터 각각 제기된 문제들은 결국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관찰하게 한다.
'나탈리'가 영화 초반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 '파비앙'의 "선생님의 생각과 책들이 절 격려하고 붙들어줬어요"라는 말에 "네 의지가 강해서 그래"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이 말 역시 후반의 '나탈리' 자신에게로 향하는 말처럼 들린다. 영화 내내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기만 하는 듯 보이지만 읽고 쓰는 사람인 '나탈리'의 삶은 흔들리지 않는다. 얻은 게 없는 것보다 잃은 게 없다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시련이나 슬픔이 자신을 어쩌지 못하게 만들 만큼의 단단한 자아와 철학이 일상을 얼마나 확고히 지탱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다가오는 것들>은 말하지 않는 듯이 말한다. 무심히 깔아 두거나 스치는 폴 발레리,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 같은 이름들의 위상을 다 알지 못해도 삶을 대하는 '나탈리'의 태도와 눈빛만으로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
<씨네 21>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에서 김혜리 기자는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세계를 직접 개선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세계를 개선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지지해준다."라고 적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일이,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그 자체로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지 하루의 작은 의미를 발견하고 그날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조금이나마 생각해보는 일이 결국은 한 달, 한 계절, 한 해를 좌우하리라는 작은 믿음이 대단한 성취나 원대한 과업, 커다란 목표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지난주에 구입한 로또는 4등에 당첨되어 있었다. 그 돈으로 책 한 권과 블루레이 하나를 주문했다.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는 여전히 구입하지 못했거나 갖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종일 <틴 스피릿>의 사운드트랙을 들어야 했는데 영화를 재생해두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이 된다. 유월의 첫날은 별 일 없는 하루였다고 하기보다 그 별 일 없음이 소중한 하루였다고 해야겠다. 새로운 한 주에 내게 다가오는 것들이 지나고 나면 내 삶에 있어 어떤 과정으로 기억될지, 궁금해진다. (2019.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