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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03. 2019

쉬운 것'만' 찾는 태도를 경계한다. (feat.명징)

글의 쓸모와 역할

어제 다녀온 <여름은 짧아 글을 써! 여러분> 클래스의 내용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글쓰기의 역할, 글의 역할, 나아가 비평의 역할에 대해 생각한다. 다시 결론. 비평이 과연 모두에게 닿을 수 있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나? 아니. 쉬우면서도 깊은 글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 글이 있으면 좋겠지. 그래야만 하는가? 아니. 순우리말부터 복잡한 한자어에 이르기까지 비슷해 보이는 뜻의 여러 가지 단어들이 존재하는 건 저마다 그 단어만이 담는 온전한 뜻이 있어서다. 유의어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 가능하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만 전해야 한다면 언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다. 그냥 울고 떼쓰고 짜증내면 될 것을 무엇하러 이야기 하나? "어떤 글은 그 본뜻을 전하려면 반드시 어려워야만 한다"라고 여러 번 강조한 적 있는데, '우리'가 글쓰기와 말하기의 여러 방법론을 배우고 연마하는 건 세상에 '완전히 모든 면에서 똑같은 두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모든 것은 그 다름 때문에 시작된다. 노력 없이, 생각 없이 모든 이야기를 소화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2019.07.02.)




*

노트에 쓴 일기와 별개로 여기에는 좀 더 써두기로 한다. 최근 이어져 온 일련의 이 생각들은 물론,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 때문인 게 맞다. (관련 글: (링크), 6월 8일 작성)


단어들을 아무거나 몇 개 생각나는 대로 써보자. 명징, 명쾌, 명료, 명확, 정확, 적확, 등등등. 이것들 중에는 비슷해 보이는 말도 있고 다소 정의와 용도가 구분되는 말도 있다. 몇 개 뜻을 살펴보자. '명료하다'는 "뚜렷하고 분명하다"라는 뜻이다. '명징하다'는 "깨끗하고 맑다"라는 뜻이다. '명쾌하다'는 "명백하며 시원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쉽다'는? "하기가 까다롭거나 힘들지 않다", "예사롭거나 흔하다", "가능성이 많다"라는 뜻들이 나온다. '쉽다'의 유의어로 '만만하다', '손쉽다', '순하다' 같은 단어들이 나온다. 이건 당연히 사전을 찾아보고 용어의 정의를 옮겨온 것이다. 그렇다면 '사전'의 정의는 무엇일까?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이라고 한다. 참고로 어학사전(辭典)과 백과사전(事典)은 다른 한자를 쓴다. 지금 얘기하는 사전은 당연히 어학사전이지. 그렇다면 어학사전은 왜 필요한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비슷하거나 다른 수많은 말들의 뜻을 헷갈려하거나 잘못 쓰지 않도록 각각의 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뜻은 무엇이며 용례가 무엇인지 등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살짝 여담이지만 하나 더. '사용한다'도 '이용한다'와 구별되는 뜻을 갖고 있다. 물론 '쓰다'라고 써도 되겠지. 그런데 '쓰다'는 동음이의어로 수많은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해당 단어가 쓰인 문장이나 글의 앞뒤 맥락과 흐름을 조금만 생각하면 헷갈릴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동음이의어를 쓰는 것보다는 정확한 뜻을 가진 다른 말을 쓰는 게 뜻을 통하게 하기 좋겠지?


한 가지 더. 위에 한줄평 얘길 잠깐 했으니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한줄평은 일정한 분량 안에 들어맞게 쓰기 위해 견해를 짧게 쓴 것이다. '깨끗하고 맑다'라고 쓰는 것과 '명징하다'라고 쓰는 것의 차이는? 당연히 글자 수. 고작 몇 글자 차이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론 'ㅇㅇ자 "내외"'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한두 음절 차이는 글쓰기에 있어 정말 중요하다. 안 써 본 사람은 모를 수 있지만. 그래, 누군가가 보기엔 쉬운 말 두고 굳이 한자어 쓰는 게 지적 허영이든 허세든 뭘 갖다 붙이든 간에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밖에 안 보는 사람은. 글쎄.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나 생각하고 싶은 의지가 없거나 (요즘처럼 두꺼운 책 없어도 사전을 간단히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 단어 뜻 찾아보기 귀찮거나 어쨌거나. "그러면 대체 언어라는 게 왜 필요한가요?"라고 반문하고 싶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같은 건 그저 환상이다. 다른 말로 '생각하고 공부하기 싫거나 귀찮다'라는 것의 반증이다.


쉬운 예로, '짜증 난다'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거기에는 수많은 이유와 상황들이 있다. 그것들은 다 다른 이야기로만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 '짜증'이라는 한 단어로만 표현되었을지라도 분명히 조금씩은 차이가 있을 감정들. 그 모든 걸 전부 한 단어로만 표현하는 건 뭐랄까. 모든 음식을 똑같은 소스에 찍어먹는 것과 같게 느껴진다. 과학에서도 지나친 단순화는 수많은 오류와 왜곡을 가져온다. 어떤 철학자의 사상을 학자 본인의 저작을 통해 배우는 것과 누군가의 해설서나 요약본 등을 통해 접하는 역시 다르다. 물론 예컨대 도저히 시간이 없어 미셸 푸코의 저작 전부를 찾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푸코에 대한 강의를 듣거나 정보를 찾아보는 행위 자체를 격하하거나 폄하해서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다른 거다. 넓고 얕은 지식과 좁고 넓은 지식 역시 중대하게 다른 것이다. 쉽고 편한 것만이 좋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동의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나 역시 스스로 '전문가'라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깊게 노력하고 오래 공부해야만 한다고 믿는 쪽이고. (내가 아무리 영화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해도, 이미 이 분야에서 훨씬 오래 글을 써온 (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나 김혜리 기자가 이 분야에 대해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에 근접하기란 과연. 그들이 들인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안 될 말이다.)


최근 정부기관에서 공문서에 쉬운 말 사용을 늘려나가고 있다 한다. 그건 정책의 투명성이나 공익적인 목적 때문일 거다. 그런데 문화의 영역에서라면? '어차피 먹고살기도 벅차고 바쁜 와중에 그것들이 일상에 하등 쓸모도 없는 건데 문화고 예술이고 다 필요 없다'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과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 역시 너무도 다르다. 탁월한 인용은 아닐 으나 오늘 소설가 김애란의 신작 산문집을 읽었으므로 거기서 대목을 가져오겠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어머니는 밥장사를 하면서도 인간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기꺼이 아무 의심 없이 딸들에게 책을 사줬다. 동시에 자기 옷도 사고 분도 발랐다.

(...)

어머니는 훗날 삶이 자신의 긍지를 무너뜨리고, 멱살을 쥐어 잡고 흔드는 와중에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공부하던 세 딸의 학비와 방세, 생활비를 모두 대셨다.

(...)

'맛나당'은 내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가방끈이 짧았지만 상대에게 의무와 예의를 다하다 누군가 자기 삶을 함부로 오려 가려 할 때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았고, 내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이랄까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

어릴 땐 꿈이 덤프트럭 기사였고, 아는 것 적고 배운 것 없지만 '그게 다 식구니까 그렇지'라는 말로부터 멀리 달아나셨던 분, 그렇지만 아주 멀리 가지는 못하신 분. 내겐 한없이 다정하고 때로 타인에게 무례한, 복잡하고 결함 많고 씩씩한 여성. 그리고 그녀가 삶을 자기 것으로 가꾸는 사이 자연스레 그걸 내가 목격하게끔 만들어준 칼국수집 '맛나당'이 나를 키웠다, 내게 스몄다."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열림원, 2019, 12-15쪽에서.)




위 책에서 김애란은 "우리 가족은 재래식 화장실과 삼익피아노가 공존하는 집에 살았고 훗날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칼자국」과 「도도한 생활」 같은 단편을 쓸 수 있었다."라고 적기도 했다. 작가의 어머니가 '먹고살기 바쁘니' 책이고 피아노고 뭐고 사주지 않으셨다면? 결론을 조금 건너뛴다. 문화와 예술은 단지 허영이고 과시인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고, 나아가 그 삶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직조하기도 한다. - 당연히 만들다와 직조하다도 쓰임이 다른 말이다.) 어차피 안 읽는 사람은 1분 동안 글로 읽을 수 있을 내용도 5분짜리 영상으로 볼지도 모른다. 어차피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본인이 무언가를 느끼지 않는 한 더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기사였나 아니면 소셜미디어 어느 페이지에서였나. 어디선가 "명징하게 직조라고 해야만 전달되는 뜻이 대체 뭐가 있는데?"라는 덧글을 읽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폴 부르제의 유명한 말이 있다. 더 이상 설명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앞으로도 '쉬운 것만 찾는 태도를 경계하기'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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