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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07. 2019

픽션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 이야기를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2017)나 브래들리 쿠퍼의 <스타 이즈 본>(2018) 같은 영화를 한없이 좋아하지만 내게 그 이상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이나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2000) 같은 쪽이다. 아니면 자코 반 도마엘의 <미스터 노바디>(2009) 같은 것이기도 하다. 사이언스 픽션이나 판타지 같은 이야기가 무엇이 좋냐고 물으면 꺼낼 수 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열 개쯤 갖고 다니면서 그때마다 좋아하는 영화나 작가의 이야기를 꺼내며 무엇이 어떻게 왜 좋았는지를 늘어놓곤 한다. 그런데 가끔은 그냥 한 편의 영화나 한 권의 책을 툭 꺼내고 "이래서 좋아"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따라서 지금 나는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말하기로 했다.


고백하자면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중 아직 첫 번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만 읽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은 즉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읽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19쪽)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52쪽)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본작은 유전자 편집 기술이 고도로 발전해 외모나 재능, 면역력 등을 유전자 '디자인'을 통해 수술로 얻거나 해결할 수 있고 신생아를 인공 자궁과 기계와 로봇을 통해 양육할 수 있는 사회를 그린다. 그러나 단편다운 것인지 세계의 정밀한 묘사보다는(본작이 그리는 세계가 디테일에 소홀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데이지'의 (서간문 형식이기도 한) 내면 묘사에 더 충실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편지 안에는 이 세계의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들어 있기도 하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기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작가노트에 실린 작가의 고민이 단발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작품 내내 느껴지고, 나아가 유토피아적 공간과 디스토피아적 공간이 서로 동떨어진 듯 보여도 치밀하게 하나의 세계로 이어지는 서술 과정에 감탄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설계하는 일이며 이것은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담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장르를 논하지 않고도 먼 미래의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술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 역시 그것이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다루는 한 동시대의 가치를 필연적으로 관통하게 된다. 본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만 읽어도 여성, 미성년자, 소수자,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가 서사의 주된 캐릭터이자 이야기를 이끄는 주역임을 알 수 있는데, 한편으로 소재 면에서는 읽는 내내 <블랙 미러>나 <기묘한 이야기> 같은 유사 장르의 영상 서사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54쪽)라는 서술에서 보듯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러면서 기술의 발전이 야기할 수 있는 어두운 미래를 직시하는 이 작품을 과연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그것의 도래 시점이 요원한 이야기라 해서 그 이야기를 허무맹랑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나. 오히려 잘 쓰인 픽션은 섬세하면서도 치밀한 현실 인식과 탐구, 깊은 고민과 탄탄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좋은 작품일수록 스스로 대답하기보다는 질문하기를 택한다.


정세랑 작가는 추천사를 통해 "마음을 다 맡기며 좋아할 수 있는 새로운 작가를 만나서 벅차다. 탁월한 것을 탁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며, 이 멋진 시작을 목격하게 된 것은 드문 행운이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썼다. 적어도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의 다른 국내 작가들을 빗댄다면, 장강명, 듀나, 배명훈의 소설을 읽었을 때와 같은 어떤 감동을 김초엽의 소설에서 받았다.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책에서 단 한 편만 읽고도 그의 소설이 내게 이야기 보따리와 생각의 타래를 한가득 안겨주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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