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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12. 2019

나는 오늘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

우연인 건지, 다행인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넘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든가, 발을 헛디딜 뻔했으나 다시 중심을 잡았다든가, 흔들리거나 급제동을 하는 지하철에서 다행히 몸이 휘청거리지 않았다. 이런 순간들이 일상에는 자주 있다. 혹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뒤따르는 일행과의 간격을 맞추기 위해 한 걸음 거꾸로 걸을 때 잠시 균형이 흔들리는 일. 표현하자면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순간이다. 이런 '장면'들이 일상에는 얼마나 많았고, 그리고 얼마나 많을까? 중학교 때 딱 한 번, 나는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적 있다.


성수연방, '인덱스(index)'


데이빗 핀처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에는 데이지가 택시를 타려다 교통사고를 당한 순간을 벤자민이 복기하는 일련의 시퀀스와 내레이션이 있다. 해당 시퀀스는 크게 데이지, 데이지를 친 택시, 그리고 택시에 탄 손님의 행적으로 나뉜다. 데이지는 발레 리허설을 마치고 샤워 후 나갈 채비를 한다. 계단을 내려가다 신발 끈을 묶는 친구를 곁에서 잠시 기다린다. 택시기사는 잠시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신다. 이후 손님을 태우고 가던 중 갑자기 무단 횡단하는 행인 때문에 급정거를 한다. 그 행인은 탁상시계 알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늦게 일어났다. (...) 데이지를 친 그 택시에 타고 있던 손님은 집을 나서다 코트를 놓고 온 것을 깨닫고 되걸음을 했고,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몇 분을 허비했다. 상점에서는 점원이 미리 물건을 포장해두지 않았다. 점원은 전날 밤 애인과 헤어져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 순간들을 복기하며 내레이션 속 벤자민은 "딱 하나만 멀쩡했어도."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뒤에는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당했음'의 계기가 앞의 수 초들이 만들어내는 수 분의 차이에 있었다는 가정이 있다. 그리고 그 가정은 위 상황들이 달리 일어났다면 데이지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추론이기도 하다. 벤자민의 내레이션은 이렇게 시작된다. "Sometimes we're on a collision course, and we just don't know it." "Collision Course". 글자 그대로는 '충돌하는 상황에 있다'라는 말인데 이는 그걸 '피할 수 없음'을 내포한다. 어떤 사고라는 건 정말 피할 수 없는 걸까? 피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본인의 의지가 아닌 걸까? 삶의 모든 순간은 그것이 지나고 난 뒤여야만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걸까.


나는 그렇게 덤벙거리는 편의 사람은 아니지만 에스컬레이터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아 잠시 휘청거린다거나 하는 일은 내게도 일어난다. 우연하고도 다행히 사고를 피한 최초의 기억은 중학교 3학년 때로 향한다. 학원을 다녔던 유일한 시기. 집에서 불과 3분 정도 거리의 학원까지는 골목길 하나와 2차선 도로 하나가 있었다. 큰길에 들어선 나는 보행 신호를 받을 수 있는 횡단보도까지 돌아가기 싫어 언제나 좌우의 차를 살핀 채 횡단보도가 없는 길을 건넜다. 하루는 내쪽 차선만 차가 줄지어 서 있고 반대쪽 차선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늦은 나는 반대 차선에서 차가 오는지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차도에 들어섰고, 멈춰 선 차들을 지나 중앙선에 접어들자 나는 오른쪽을 살피지 않은 채 뛰었다. 거의 3/4 가량 건너는 순간 오른쪽에서는 긴 소리의 경적이 들려왔고, 길을 다 건너자 나는 등 뒤로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 차와 내가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조차 전혀 몰랐지만, 학원에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오늘 낮에 머물던 카페에서 일어나는 순간, 내 손에 든 클러치가 유리잔을 건드려 잔이 깨졌다. 연신 죄송하다고 하면서 다치지 않으셨냐고 그냥 두셔도 된다고 하는 직원의 말씀에 또 감사하다고. 죄송한 건지 감사한 건지 모르겠는 죄송한데 감사하고 감사한데 죄송한 말을 연발하며 멋쩍게 카페를 나섰다. 벌어지지 않은 일은 어떻게 내 하루가 되고, 벌어진 일은 또 어떻게 내 하루가 되는 걸까. 삶은 늘 모르는 방향으로 흐른다. 오늘도 나는 넘어지지 않은 순간들을 지나 내일이었던 날을 오늘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남은 얼음 조각들은 바닥에 흩어졌고, 깨진 유리잔은 되돌릴 수 없다. 우연인 걸까 다행인 걸까. (2019.07.11.)


뚝섬, 'Pers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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