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은 컴퓨터 그래픽 기술력의 힘을 자신의 세계가 '진짜처럼'이 아니라 '게임처럼' 보이도록 활용하면서도, 작중 아르테미스/사만다, 그리고 제임스 할리데이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끊임없이 '가상현실은 현실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OTT 서비스와 유튜브와 같은 '탈극장' 플랫폼이 꾸준히 주류로 자리 잡는 가운데 <레디 플레이어 원>은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기는 과정에서 '극장에서의 엔터테인먼트'에 최적화된 각색 방향을 택한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첫 번째 미션을 오락실 게임 대신 뉴욕 도심의 레이싱으로 변경한 점)
특히 파시발/웨이드가 가상현실 '오아시스'에 접속하기 위해 바이저를 얼굴에 착용하는 과정은 이미 현실을 벗어나 '극장'에 온 관객이 '한 번 더' 영화 속 현실 세계 밖 '가상현실'로 '입장'하게 만든다. (해당 신을 그렇게 연출했다.) 요컨대, 영화 속 세상이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듯 <레디 플레이어 원>의 이야기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가상의 것임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시종 이어지는 오아시스 안팎의 대비 역시 결국은 영화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역할, 나아가 오직 사이언스 픽션만이 해낼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정수를 이룬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넷플릭스 영화는 아카데미(Oscar)가 아니라 에미(Emmy)로 가야 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 있다. 오해되거나 와전되기 쉽지만 이 말은 넷플릭스나 디즈니+ 같은 서비스를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오로지 극장에서만 가능한 고유 경험이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말이다. 과연 거실 소파에서 편히 앉아 TV로 중간중간 멈춰 가면서 보는 영화가, 극장에서의 순수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가? '그래서 무슨 내용이야? 재밌어?' 같은 종류의 축약된 감상을 논한다면 불가능하진 않겠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요약될 수 없듯 영화 역시 마찬가지의 성질을 지닌다. 1,100만 관객 돌파를 앞둔 <알라딘>의 '4DX 관객'만 100만 명을 넘은 사실도 '극장에서만 가능한 엔터테인먼트'를 반증하는 것이다.
한정된 분량상의 비약을 일부 무릅쓰자면 영화가 선사하는 이야기는 (극장의 환경을 통해) 영화 밖 현실과 잠시 벗어난 상태여야만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 알폰소 쿠아론의 걸작인 <로마>(2018) 역시 '넷플릭스 영화'임에도 영상과 음향에 있어 '극장에서 최적화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관한 영화이기만 한 게 아니라 가상현실로 대표되는 영화가 선사할 수 있는 경험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20세기 '블록버스터'의 역사를 만든 감독이기만 한 게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걸작을 만드는 감독임을 <레디 플레이어 원>은 확실하게 증명한다. (물론 <더 포스트>(2017)를 동시에 연출하기도 했다) 여전히 영화는 극장의 매체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면서, 20세기의 팝 컬처에 자신이 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헌사를 담아서.
02. 그 영화를 열 번째로 보면서 '열한 번째로 보게 될 때'를 준비하는 마음
다음 이야기는 작년에 쓴 기록으로부터 시작하겠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기 시작한 건, 실은 한 번만 보고도 술술 그 영화를 분석해내는 이들이 부러웠기 때문이고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나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나를 찾아줘> 같은 영화를 그렇게 극장에서 많이 봤던 것도 그래서다. 좋은 것을 더 잘 좋아하고 싶어서. 무작정 반복해서 장면과 대사를 복기했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더 많이, 넓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극장에서 여섯 번이나 보고서야, 그걸로 모자라 원작 소설을 두 번 읽고 나서야, 그제서야 영화와 책을 아우르는 글 하나를 더 쓰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느리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라서. 말보다 글이 앞서고 글을 적을 때면 늘 이게 맞을까 망설이는 사람이라서." (2018.05.16.)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스스로에게 확신이 부족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일이었으며, 극장 영사기의 불이 꺼진 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쓰는 일이었다. 잘 모르겠을 때는 영화를 한 번 더 봤고, 읽은 책의 앞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제야 미문이나마 간신히 쓸 수 있었다. 2018년 5월 16일 이후 <레디 플레이어 원>을 극장에서 두 번 더 봤고, 소장용 VOD는 물론 블루레이 역시 출시되자마자 샀다. 나는 이 영화의 무엇에 이끌렸나. 그건 한 영화의 존재가, 내 삶의 그 이전과 이후를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영화를 되풀이할수록 조금씩 분명해졌다. 심지어 그것들은 각자 다 다른 영화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IMAX(CGV)를 포함한 일반관에서 볼 때와, MX관(메가박스)에서 볼 때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사운드트랙의 순서가 달랐다. 그 작은 디테일은 곧 전체를 만들기도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제임스 할리데이는, 자신이 개발한 가상현실 '오아시스'가 (친구이자 동업자인 오그던 모로의 언급에 따르면) '원 플레이어 게임'이 되지 않기를 원했다. 이는 표면적으로 '오아시스'가 특정인에게 독점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이며 이면에는 스스로 '오아시스'를 통해서나마 누군가와 함께이기를 꿈꿨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역설적으로 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 어쩌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일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공감과 위로를 얻었다. '좋아하는 것'은 대상을 나타내는 동시에 행위 자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넌 진짜 세상에 사는 게 아니야. 가상현실 속에서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거지."라는 아르테미스의 말은 동시에 관객인 나를 향하는 말이기도 했다. 영화가 단지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영화를 1,000편씩 보고 같은 영화를 여덟 번씩 본다고 해서 내 삶에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포토티켓을 여덟 개 만들고 리뷰를 세 번 쓴다고 해서 "넌 정말 <레디 플레이어 원>을 좋아하는구나!"라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글쓰기도 영화도 모두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산물이다. 영화에서 웨이드 와츠가, 제임스 할리데이가 남긴 이스터 에그를 찾는 일 역시 '에그를 찾아내고 대회에서 우승한다'라는 결과가 아니라 최종 관문까지 가는 데 필요한 세 개의 열쇠를 찾는 과정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각각의 열쇠를 발견하려면 제임스 할리데이가 남긴 단서들을 바탕으로 유추하고 추론해야 하며 그 열쇠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까지 알아내야 한다. 영화의 기반이 된 소설의 원작자 어니스트 클라인은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속편을 쓰고 있다. 그러니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은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락실에서 게임기에 동전을 넣을 때의 기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떠올리며, 나는 언제든 다음 이야기를 맞이할 준비를 계속해야 한다. 열 번 봤으면, 열한 번째로 볼 준비를 말이다. (2019.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