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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30. 2019

비(非)일상의 극장에서 만나는 영화의 의미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과 가상현실의 이야기

비(非)일상의 극장에서 만나는 영화의 의미 -

<레디 플레이어 원>이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방식으로부터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내용 언급이 포함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 기반 영화, 즉 ‘극장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진출하는 것에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요컨대 “넷플릭스 영화는 아카데미(Oscar)가 아니라 에미(Emmy)로 가야 한다.”라는 것인데, 올해 2월 CAS 어워드에서 나온 이 말은 이후 넷플릭스가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내게는 스필버그가 넷플릭스 영화의 가치나 완성도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라기 보단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가 줄 수 있는 본연의 경험을 옹호하는 것으로 들렸다. 왜냐하면 시상식에서 그가 한 발언의 내용 중에는 “영화제작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관객들에게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motion picture theatrical experience)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라는 말과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크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간접체험을 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이와 같은 발언을 곱씹으면서 그의 최근작인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을 떠올리던 중 ‘현실과 가상현실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가 과연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스필버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헌’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다.


사이언스 픽션 장르의 영화들이 지금 당장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거나 앞으로도 존재하기 어려운 소재나 세계를 다룬다는 것을 상기할 때, ‘가상현실’이라 함은 ‘지금은 여기 없는 것’ 혹은 ‘앞으로도 여기 없을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레디 플레이어 원>이 구현한 가상현실 ‘오아시스’(OASIS)는 다중 접속 롤플레잉 게임(MMORPG)을 기반으로 AR이나 VR과 같은 오늘날의 여러 기술들이 최첨단으로 진화한 형태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디 플레이어 원>이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2045년이 정말로 도달한다 해도, 마치 실제 2019년 7월 19일이 마이클 베이의 <아일랜드>(2005) 속 ‘2019년 7월 19일’과는 다르듯이, ‘오아시스’는 영화를 보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주 가까운 미래에 경험하게 될 무언가는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사회에서 불가능한 상상 속 이야기라고 해서 허무맹랑하고 뜬구름 잡는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어떤 이야기든 결국 인간 세상을 반영한다’는 뻔한 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다. 나는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과 ‘(SF를 중심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의 의미를 나란히 연결해보면서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이 어떻게 영화 바깥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컷


극장, 일상을 벗어나는 엔터테인먼트


앞서 소개한 스필버그 감독의 발언 중 ‘크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의 경험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상영 전 광고가 지나간 후,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극장 상영관은 출입문이 닫히고 내부 조명이 소등된다. 즉, 극장이라는 같은 건물 안에 있지만 특정한 영화가 상영되는 상영관은 바깥 및 다른 상영관과 한시적으로 차단되어 ‘그 영화만의 세계(A)’가 된다. 혹은 최소한 ‘그 세계로 떠나는 놀이기구(B)’가 된다. 외부 소음을 차단하고 내부를 어둡게 하는 일이 단지 스크린에 몰입하기 위한 것이기만 할까. 여기에는 한 가지 속성이 더 있다. 옆 사람과 떠들지 않고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거나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는 과정이 동반되는 이유는 물론 온전한 몰입을 돕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B에 ‘탑승해 있는’ 동안에는 오로지 A로 향하는 목적에 충실하면서 A에 잠시 머무는 동안 직장이나 학업, 인간관계 등 바깥 세계로부터의 간섭과 개입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이 말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일상의 엔터테인먼트이기에 앞서 일상을 벗어나는 엔터테인먼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은 상영관의 ‘관문’을 열고 영화 속 세계에 도달해 일정 시간 동안 그 세계를 탐험하며 머문다. 영화가 끝난 후 조명이 켜지고 출입문이 열리며 우리는 다시 극장 밖으로 돌아가지만 적어도 극장이라는 공간이 존재하는 건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한정된 시간 동안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비(非)일상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영화의 내부 역시 영화 외부와 마찬가지로 나 혼자만 있거나 아는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면 영화가 설계해놓은 세상에 제대로 빠져들기 어렵다. 그래서 상영관 안에는 같은 세계로 떠나길 약속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있다. 요컨대 관객은 이미 친숙한 생활공간을 벗어나 ‘영화 세계에 입장한’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여기까지는 극장에 개봉하는 모든 영화에 적용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관객이 이미 들어선 세계에서 내부에 있는 더 깊숙한 세계로 한 번 더 관객을 인도한다. 꿈속이나 사후 세계 혹은 평행 우주처럼 영화 안에 세계가 한 겹 더 있는 경우가 <레디 플레이어 원> 뿐은 아니겠으나 여기서는 <레디 플레이어 원>이 그 세계를 관객이 경험하게 만드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컷


<레디 플레이어 원>이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방식


영화에는 제시되지 않지만 ‘오아시스’(OASIS)는 어니스트 클라인의 원작 소설에 따르면 ‘존재론적 인간중심 감각 몰입형 시뮬레이션’으로 번역된다. (후술하게 될 ‘오아시스’의 모습 중 영화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것은 모두 소설을 참고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오아시스’에 처음 들어설 때를 떠올려보자. 주인공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이하 ‘웨이드’)의 내레이션으로 2045년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모습을 요약한 후 그는 ‘오아시스’ 활동에 필요한 장비인 햅틱 글러브와 바이저를 착용한다. ‘웨이드’가 바이저를 얼굴에 착용하는 순간 관객이 보는 영화의 시점은 고스란히 ‘웨이드’ 본인의 시점과 일치하게 된다. 이로써 영화는 단지 ‘웨이드’가 ‘오아시스’에 대해 설명만 하도록 두지 않고 관객을 거기 함께 ‘입장’시킨다. 그러니까 ‘웨이드’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동시에 관객의 ‘오아시스 투어 가이드’ 역할도 병행한다. 극장의 세계를 ‘상영관 외부(현실) - 상영관 내부(영화)’라고 칭해본다면 영화의 세계가 ‘현실 - 가상현실’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레디 플레이어 원>의 상영관이라면  ‘상영관 외부(현실) - 상영관 내부(영화의 현실) - 상영관 내부의 내부(영화 안 가상현실)’로 한 차원이 더 있는 셈이다. 이는 단지 ‘오아시스’가 영화 내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오아시스’에 인물이 접속하는 행위를 영화가 주의 깊게 보여줌으로써 기능한다. (만약 3D 안경을 착용하고 영화를 관람한다면 그 관객은 이때 가상의 안경을 한 겹 더 착용하는 것이겠다.)


‘오아시스’가 MMORPG를 기반으로 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이하 ‘할리데이’)가 세운 회사명이 ‘그리개리어스 게임즈’인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오아시스’ 역시 출발은 MMORPG였다. 그러나 ‘오픈소스 가상현실’을 적용하면서 사용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접속이 ‘오아시스’의 서버 용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동시에 ‘오아시스’ 역시 상상력의 크기만큼 무한하게 방대한 세계가 되었다. 신분과 성별 및 외모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되고 싶은 누구나’가 될 수 있는 이곳의 사용자들은 대부분 아이템 수집이나 ‘레벨업’과 같은 게임성 측면보다는 세계 안에서의 문화생활과 쇼핑, 사업, 소셜 네트워킹 등을 즐긴다. 식사와 용변과 수면만을 제외하면 ‘오아시스’는 가상현실이라기보다 사실상 삶을 영위하는 세계 자체나 다름없다. ‘오아시스’에서 쓰이는 코인 역시 법정화폐로 세계에서 가장 안정성 높은 화폐단위로 통용된다. 여기서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는 벌써 희미해진다.


‘오아시스’가 게임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이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느냐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두 가지 의미로 중요하다. 첫째로, 영화가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려올 때 그 목적은 주로 실제 촬영으로 만들기 어려운 것을 담거나 촬영한 것을 더 사실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레디 플레이어 원>은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당장 ‘웨이드’의 아바타인 ‘파시발’을 비롯해 이 세계 안의 캐릭터들은 피부의 색과 질감부터 이질적으로 보인다. 둠 행성을 비롯한 공간의 구현은 그럭저럭 사실적이라고 할 만하지만 아바타들은 영화 내내 자신이 ‘게임 캐릭터’라는 것을 관객에게 전혀 거리낌 없이 내보이듯 걷고 말하고 행동한다. 두 번째는 영화가 고전 오락실 게임을 뉴욕 도심을 배경으로 한 레이싱 경주로 바꾼 것과 같이 소설의 주요 관문을 영화가 선사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에 최적화 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세 개의 열쇠를 찾는 과정은 그 자체로 ‘퀘스트’를 해결하는 롤플레잉 게임의 구조를 띠며 그것을 제시하는 ‘할리데이’가 죽기 전 남긴 영상에서 그의 아바타 ‘아노락’의 시선은 상술한 ‘오아시스 입장’ 때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향하기도 한다. 영화의 처음 10분간 관객은 자연스럽게 ‘웨이드’와 함께 열쇠를 찾는 ‘건터’가 된다.


캐릭터의 시점 숏은 관객을 가상현실로 끌어들이는 상징적인 장치이지만, 영화는 관객을 가상현실에만 머물도록 허락하지는 않는다. 바이저를 얼굴에 착용한 인물들의 정면(즉, 앞선 시점과 정반대의) 모습을 빈번하게 보여주면서 바이저의 인터페이스를 숨기지 않는 연출은 지금 보고 있는 이미지가 물론 진짜가 아니라 게임 플레이 화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IOI가 만든 X1 슈트를 구입하면 실제처럼 아바타의 감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아바타가 자신이 될 수는 없고 ‘오아시스’ 밖의 사용자가 정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고레벨의 장비로 무장하고 있어도 현실에서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작가 스필버그는 사람들이 무리한 빚을 내서 ‘오아시스’ 안의 아이템을 구입하거나 아이템 사냥 중에 아바타가 죽자 장비를 벗고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려 하는 모습 등을 무시하거나 숨기지 않지만, 관객이 ‘오아시스’ 안에 ‘과몰입’ 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이는 의도적으로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에 선을 그어 관객이 현실을 끊임없이 자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세계를 ‘환상적으로’만 구현하느라 기술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신 ‘오아시스’ 밖 현실의 생활을 원작보다 더 많이 보여줌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를 이끌어낸다. 무엇보다 세 번째 열쇠를 찾은 직후 펼쳐지는, 궁전처럼 호화롭게 꾸며진 황금 ‘에그’의 방은 ‘웨이드’를 테스트하기 위한 위장이었을 뿐 어릴 적 ‘할리데이’의 허름한 방을 실사로 재현한 공간이 진짜 ‘에그’를 획득하는 공간이라는 점도 유의미하다. (이 장면만큼은 ‘가상현실 안의 가상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오아시스’는 ‘감각 몰입형 시뮬레이션’으로만 존재할 수 없고 앞에 ‘존재론적 인간 중심’이 항상 동반한다는 것.


가상현실의 경험은 곧 현실의 경험이 된다


그렇다면 단지 ‘오아시스’의 안팎을 골고루 보여주기만 하면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룬다는 말인가?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웨이드’가 에그 사냥에 나서면서 어떤 내적 성장을 이루게 되는지, 그리고 ‘할리데이’가 ‘오아시스’를 왜 직계 가족도 친구인 ‘오그던 모로’(사이먼 페그, 이하 ‘오그’)도 아니고 누가 될지도 모르는 ‘세 개의 열쇠를 먼저 찾는 사람’에게 물려주려고 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마법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세 번째 미션 장소를 앞두고 ‘웨이드’가 “자신보다 중요한 것을 찾았다”며 “오아시스를 지켜내자”라고 건터들을 규합하는 연설은 앞선 두 번째 미션 이전에 트레일러 빈민촌의 폭발 사고가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중간 과정을 일부 건너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웨이드’가 “현실이 싫어 이곳에 왔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내용상 유의미하다. 이는 물론 ‘할리데이’ 본인이 ‘오아시스’를 처음 만든 이유와도 정확히 연결되기도 하지만, 빈민촌의 황폐하고 희망 없는 일상을 잊게 해주는 일탈이었던 ‘오아시스’에서 ‘삶의 이유’를 찾았다는 고백은 스필버그가 말한 “영화제작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이 무엇인지, 곧 ‘영화를 만드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오아시스’가 아무리 ‘가상’현실이라 해도 그 안에서 친구와 즐거움을 공유하고 문화적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생겨나는 경험과 추억은 햅틱 글러브와 바이저를 벗어던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가상의 무엇이라 해도 거기서 나오는 감정은 진짜라는 의미다. (이 ‘진짜’는 ‘오아시스’ 안에서는 종종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에 ‘웨이드’를 비롯한 숙달된 ‘오아시스’ 사용자들은 필요에 따라 감정을 숨기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할리데이’를 연기한 마크 라이런스가 스필버그의 전작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에서도 ‘꿈을 만드는 거인’을 연기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조금 전에 말한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곧 관객이 극장을 찾아가 영화를 관람하는 이유와도 크게 무관하지 않다. 감독과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라는 매체에 담아 전달하고, 때때로 그 이야기는 과학과 상상력의 힘을 빌어 지금 여기 없는 것에 대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관객은 감독과 작가의 상상이 영화가 구현해낸 세계로 구체화 되는 것을 보면서 빠져들고, 영화가 끝난 후 현실 세계로 돌아오더라도 영화를 보는 동안 자리 잡은 간접체험과 거기서 비롯된 꿈을 잊지 않는다. 스필버그가 10대 때부터 직접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기 시작했듯, <레디 플레이어 원>의 원작자 어니스트 클라인이 스필버그가 이룩한 블록버스터의 세계 안에서 유년을 보내고 스토리텔러의 꿈을 꾸었으며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듯, 가상의 경험은 허구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도 영향을 준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게임처럼 세 단계의 어드벤처를 깔아놓고 영화와 드라마, 음악, 게임을 아우르며 20세기와 21세기를 모두 끌어안는 수백 개의 대중문화 레퍼런스를 수시로 보여주는 동안 바로 그 대중문화의 영향권 아래에서 유년을 보내고 성인이 된 관객들은 영화로 인해 각자의 추억을 재소환하고, 과거와 현재의 자신들의 (대중문화 콘텐츠를 향한) 감정들 역시 ‘진짜’였음을 상기하게 된다.


“현실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인 동시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할리데이’와 ‘웨이드’의 공동의 깨달음이 뭉클한 이유는 한편으로 ‘오아시스’의 세계가 결국 순수한 꿈을 꾸는 이들의 손에서 지켜지는 모습을 관객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그’가 말하길, ‘할리데이’는 ‘오아시스’가 ‘원 플레이어 게임’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말은 그가 ‘오아시스’가 IOI와 같은 자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아시스’를 진정으로 아끼는 사용자‘들’의 손으로 유지되기를 꿈꿨다는 의미다. ‘오아시스’ 세계의 많은 부분은 ‘할리데이’ 자신이 사랑했던 팝 컬처들로 채워졌다. ‘오아시스’의 사용자들이 그 세계에 애정을 갖고 빠져들수록 ‘오아시스’ 세계를 지탱하는 바탕이자 뼈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게 된다. 이 애정은 IOI 직원들이 ‘놀런 소렌토’(벤 멘델슨)에게 기계적으로 주입시킬 수 있는 게 아니며, 주입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은 레이싱 경주에서 후진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직관적 판단을 가능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태동할 수 있었던 건 집약적인 자본과 체계화된 제작 시스템의 힘 때문이었겠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생명력을 잃지 않은 건 ‘영화 엔터테인먼트’가 선사하는 간접 체험에 열렬히 몰입해 준 관객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스필버그만이 만들 수 있었을 작품이겠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컷


안방과 거실이 아닌, 오직 극장에서


극장이라는 ‘약속된 공간’이 없어도 위와 같은 가상현실의 체험이 가능할까. <‘웨이드’가 생전 ‘할리데이’가 남긴 단서를 순수한 ‘덕질’의 힘으로 찾아내 결국 ‘오아시스’ 세계를 악덕 기업으로부터 지키고 사랑도 쟁취한다>는 영화의 전개 자체를 ‘파악’하는 일은 물론 집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집은 익숙한 공간이며 TV나 컴퓨터는 생활가전의 하나일 뿐 그 자체로 독립된 세계가 되지 못한다. 홈 씨어터가 아무리 발전해도 생활공간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시청자’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과 동일선상에 놓지 못하게 한다. (만약 집에서 극장 상영관만큼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좌석을 비롯한 모든 시설과 장비들을 ‘극장 수준’에 걸맞게 구비한다면 그것은 이미 집이 아니라 극장이기를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디즈니의 실사 영화 <알라딘>(2019)이 국내에서 4D 포맷 관람객만 100만 명을 넘어서고 극대화된 영상과 음향을 ‘경험’하기 위해 주요 블록버스터 영화의 개봉마다 IMAX 상영관의 예매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광경은 IPTV와 VOD가 널리 보급되고 OTT 서비스가 저마다 ‘오리지널 콘텐츠’를 내세우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웨이드’가 햅틱 바이저를 착용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오아시스’의 광경을 사람 키보다 몇 배는 큰 스크린과 영화에 최적화된 음향 설계, 그리고 3D 안경과 같은 영화 관람의 경험을 강화하는 극장 도구 없이 본다면? 언젠가는 집에서도 극장에 뒤지지 않는 관람 환경이 보편화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이 ‘집’인 이상, 특정 장면에서 멈추거나 ‘지루한’ 장면을 건너뛰는 등의 일이 가능한 그곳은 ‘비일상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지 못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제목이 갖는 의미를 상기하자면 오락실 게임기 앞에서 동전을 넣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준비의 과정은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게임 역시 중간에 마음대로 멈출 수는 없는 경우가 많다.)


스필버그의 발언을 지지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두 번째 미션에서 영화 <샤이닝>(1980)을 밀접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 영화가 SF의 걸작으로 칭해지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만든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라는 점에서 일상에 없는 상상 속의 체험을 하게 만드는 SF라는 장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도 ‘웨이드’와 ‘하이파이브’ 일행은 ‘오아시스’ 내에 구현된 ‘<샤이닝>이 상영되는 극장’에 입장한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나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면 체험의 기반은 ‘공감’에 있다. ‘주인공이 겪는 일을 나도 비슷하게 경험해보았다’, 혹은 ‘저런 일이 생긴다면 나도 나름대로 판단해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등의 것이겠다. 현실에 없는 상상의 이야기라 해서 앞의 것이 빠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오아시스’ 같은 가상현실을 다루는 영화라면 ‘(지금은 없지만) 진짜 오아시스 같은 게 있다면 과연 이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같은 궁금증과 상상이 앞서게 된다. SF는 소재 자체로 상상력과 흥미를 자극하고 진보된 시청각적 스펙터클은 그것을 관객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게임 역시 그래픽 기술의 발전과 함께 아케이드를 넘어 ‘시뮬레이션’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게임 세계에서 로그아웃 하는 순간 모두가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상상의 세계는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상의 경험이 단지 허구에 그치지 않는다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 여기 없는 것을 상상하는 힘은 현실 세계에서 영감을 이끌어내고 발명과 변화를 낳는다. 할리우드가 오랫동안 ‘꿈의 공장’이라고 불린 건 그 자체로 영화가 선사하는 이야기가 공상이 아니라 ‘꿈’이 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꿈이 존재하고 ‘꿈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 한 현실 세계는 지속적으로 꿈(가상)과 상호작용하며 공존한다. 허문영 평론가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해 다루면서 “영화는 자신의 픽션적 능력과 환영적 자질에 구멍을 내지 않고는 현실 자체와 접촉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FILO』 2호, ‘두 명의 스필버그 -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고 떠오른 짧은 생각’에서) 일부 수긍하면서도 이 말을 조금 바꾸고 부연해서 적어보고 싶다. 영화가 다루는 가상의 세계는 자신이 픽션임을 잊지 않은 채로, 관객에게도 그것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면서도 스스로를 현실과 연결할 수 있다.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이 가상현실과 현실을 끊임없이 대조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사실로부터 이 영화의 동시대적인 가치를 찾는 일이 유의미하다고 믿는다.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현실의 어두운 모습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가상현실과 SF를 앞세워) 이 세계가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을 대중문화이자 엔터테인먼트의 형태를 하고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엔터테인먼트는 집이 아니라 극장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현실에서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밥을 먹을 수 없는 가상현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SF를 통해, 그리고 대중문화를 통해 느껴왔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곳은 항상 극장이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에 관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발언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극장의 존재는 극장 밖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꿈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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