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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1. 2019

제게는 오랫동안 '밤의 선생'이 필요할 것입니다

황현산 선생님의 1주기 행사에 다녀와서

난다 출판사에서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님의 1주기를 맞이하여 마련한 '추모의 방'과 '추모의 밤' 행사에 다녀왔다. 한 사람의 삶과 그의 말과 글을 오래도록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한 해가 지나도 한곳에 모여 있다는 일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무겁기만 한 분위기가 아니라 제법 자주 웃음이 함께인 자리였다. 아드님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꺼내놓고 아버지를 추모하러 와준 사람들에 대해 감사를 전할 때는 잠시나마 숙연한 마음을 가지면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지금 기억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고, 고대 불문과 교수로 계신 분께서 선생님에 대한 기억들을 "아마도 재미없고 따분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라면서 하나 둘 꺼내놓을 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8월 8일, 합정 '디어라이프'에서


얼굴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병률 시인과 박준 시인을 비롯한 문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분들과 딱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몇 분들은 낭독회나 강연 행사에서 수줍게 책 사인을 받으며 인사 드렸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저 얼굴만을 아는 문학인들을 멀리서 보며, 좋아하는 시인 분들이 자리한 것을 가까이에서 보며, 그리고 언젠가 낭독회 같은 문학 행사에서 스쳤을 법한 낯선 얼굴들의 (열기 속의) 온기를 주위에서 느끼며, 일종의 내적 친밀감 같은 것을 경험했다고 하면 섣부른 과장일까. 여전히 무르지만 좀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집에 와서는, 선생님 책의 여러 페이지들을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스24에서 주문했던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를 취소하고는 추모 행사 현장에서 그 책을 구입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늬 선생님의 트위터를 (리트윗과 멘션을 제외하고) 엮은 책으로, 서문은 아드님께서 쓰셨다. 그리고,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이 재출간되었다. '황현산'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의 삶과 문장을 떠올리다 보면 밤마다 꺼내보고 싶은 그분의 말들이 너무나 많다. 오늘은 그중 몇 가지를 다시 기록해두기로 한다. (2019.08.08.)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 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황현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서)


"예술이 지향하는 이상 가운데 하나는 아룸다우면서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 것은 이 쓸모없다는 것은 '지금은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의 쓸모를 찾아내는 것이 문화의 발전이기도 하다."

(황현산, 트위터에서)


"예술이니 뭐니 하는 낯익고도 모호한 개념 앞에서 "개뿔 그런 것은 없어"라고 말하면 멋있고 깨우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게 말버릇이 되다보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보게 될 위험이 있다. 순진성의 카드를 끝까지 쥐고 있는 것이 오래가는 길이다."

(황현산, 트위터에서)


"문학을 통해서만 발언될 수 있는 말들이 있다는 점을 굳게 믿는다. 문학의 말은 유일하게 순간마다 자신을 반성하는 말이며, 반성한다는 것은 한 말이 다른 말의 권리를 막지 않았는지 살핀다는 것이다. 이 반성으로 말은 제자리를 차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이 들어설 자리를 만든다. 그래서 모든 생각이 교착에 빠지고 모든 논의에 한 걸음의 진전이 불가능한 정황까지도 새로운 말이 솟아나오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문학에 대한 나의 소박한 생각이며, 변하지 않을 믿음이다."

(황현산, 『말과 시간의 깊이』에서)


"'한컴오피스 한/글'(2014년판)의 맞춤법 검사 기능은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갔다'고 쓰면 '감옥'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교도소'로 고치라는 것인데, 모든 감옥이 교도소는 아니다. '말은 하기 쉽다'고 쓰면 '하기'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다음'이나 '아래'로 고치라는 것이다. '키가 크다'라고 쓰면 '키'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열쇠'로 고치라는 것이다. (...) 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황현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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