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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5. 2019

코피일기: 피 안 흘리고 살 수는 없나요

태어나서 처음, 이비인후과에 갔다

외출 준비를 하며 씻는데 코피가 났다. 갑자기. 코에 물리적 충격이 가해졌거나 스스로 코 안을 들쑤신 것도 아닌데. 한창 미세먼지가 난리일 때도 밖에서 숨을 쉬거나 야외 활동을 하는 데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고 나름대로 대기에 민감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겨왔었던 터라, 코피는 당황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어릴 때 나름 코에 손가락 좀 넣어본 편이지만 지금에야 그러지 않은지가 몇 년인데 대체. 코에 무슨 이상이 있나? 아니면 바로 이 코피가 신체 건강의 어떤 적신호인 건가? 잘 먹고 잘 자고 밤샘도 안 하고 그렇게 혹사하지도 않는데, 그러면 좀 억울한데.


아니. '갑자기'인 코피는 아니긴 했다. 몇 개월 전에 (글로 적자니 조금 민망한 이야기임을 무릅쓰자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다 다소 억지로, 조금 과하게 힘을 준 일이 있었다. 필요를 느껴 화장실에 갔는데 아무것도 처리(?) 하지 못하고 나서긴 좀 그렇잖아,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아니, 화장실 뭐 좀 이따 또 가면 되지!라고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힘을 주던 그때, 코피가 두어 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어느 레스토랑 화장실이었는데 순간 놀라 바닥을 휴지로 닦았다. 거울에 비친 코를 살폈다. 피가 더 나진 않는구나. 다행이다.


그 후 일정한 주기는 없지만 잊을 만하면 코피가 조금 나곤 했다. 주로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 샤워를 할 때. 일정 시간 이상 지나도 피가 멈추지 않는다든가 하는, 의학 지식이 없어도 생각할 만한 '심각한' 경우는 없었기에 특별히 코피에 의미를 두지는 않았었다.


한데 문득, '혹시 모르니 검사라도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비인후과에 갔다.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 '문래동 이비인후과'라고 지도 앱에 검색해서 나온 곳을 그냥 갔다. 이비인후과 첫 방문임을 확인하듯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연락처를 적었다. 손님이 많지 않았고 금방 진료실에 들어가 만난, 아빠 나이쯤 되실 듯한 원장(으로 추정) 선생님. 나와 바싹 붙어 앉은 선생님은 마술봉처럼 생긴 가느다란 무언가를 내 코에 대고 코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코피의 진원지를 알려주셨다. 여기 여기, 살짝 헐어 있는 거 보이죠? 코피가 난 그 자리에 작은 혈관이 조금 터져 있다는 것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적자면, 코 양쪽 구멍 사이에는 미세한 혈관이 많은데 예컨대 조금 무리한 운동을 해서 머리 쪽으로 피가 쏠린다든가 하는 일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은 코에 자극을 주기도 한다는 것. 내 경우 코피가 왼쪽에서 난 적은 없고 오른쪽에서만 발생했다는 건 오른쪽 코 내부가 좀 더 헐어 있다는 뜻인 것. 그리고 환경적 요인을 상세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코 내부가 다소 건조하고 약해져 있다는 것. (에어컨 바람을 너무 쑀나?) 등등의 이야기가 오간 후 진료 내용을 안내받았다.


'지진다'라는 표현에 마치 인두 같은 도구를 쓰는 어떤 행위를 상상했는데, 말 그대로 혈관이 터진 자리를 봉합하는 것이었다. 대단한 진료는 아니었지만 좀 많이 따끔거렸다. 치과에서도 한 시간 넘게 입 벌린 채 혀 움직이면 안 되는 상태를 견디는 동안 아무렇지 않았는데, 코는 눈과도 가까운 부위여서 그런지 그 따끔거림을 느끼는 동안 눈에서도 눈물이 몇 방울 흘렀다. 선생님 저 절대 무섭거나 겁나서 눈물 흘린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지지는 동안' 움직이면 진료에 방해가 될 수도 있고 괜히 말을 하는 게 '아무렇지 않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얌전스럽게 있었다. 그동안 코로 숨 쉬지 말고 입으로 천천히 숨 쉬라고 하셨기도 하고.


봉합은 잘했지만 당일에는 일시적으로 피가 몇 방울 날 수도 있고, 며칠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것인데 너무 코를 세게 풀거나 손가락으로 코 안을 만지거나 하지 말 것을 당부받았다. 약 처방은 없었다. 이 사소한 이야기를 글로 쓴 건, 당부 후의 선생님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코피가 꼭 무슨 대단하거나 위험한 시그널인 건 아니에요. 코에는 혈관이 많아서 피는 누구나 언제든 날 수 있거든요. 코피에 놀랄 수는 있지만 한 10분 20분 지나도 안 멈추는 거 아니면 별 의미부여 안 하셔도 돼요. 코피는 날 수 있어요." 코피는 날 수 있다. 그래, 사람에게는 피가 있고 피는 몸 안을 흐르지만 밖으로 날 수도 있다. 그런 거라고 생각해보며 이비인후과 건물 1층의 식당에서 국수와 김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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