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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23. 2019

집밥에 평생을 빚진 내 성년의 삶의 순간들

자취생활자의 숙명 같은 것

자취의 이유는 대체로 학업 아니면 취업이겠다. 전부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나 많은 자취 생활자가 주기적으로 경험하는 일 중 하나란, 부모님의 택배, 정확히는 엄마가 보낸 택배를 받는 일이다. 지방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나온 뒤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왔다. '엄마의 택배'와 내 인연은 그래서 스무 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몇 년은 기숙사에 살았다. 기숙사 안에 컵라면 자판기도 있고 사생 전용 식당도 있었지만 엄마 눈에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기숙사에 짐을 풀고 '서울 라이프'를 시작한 얼마 뒤 불쑥 택배가 왔다. 꽤 무거운 박스에 겹겹이 테이프가 붙은 채였다. 엄마의 이름이 '보낸 사람'에 적혀 있었고, 내용물은 각종 과자나 초콜릿 같은 간식들, 그리고 두유였다. '지금쯤이면 아들이 택배를 받았겠다'라고 생각한 엄마의 전화가 날아들었다. "아들 공부할 때 안 지치고 힘내서 잘하라고 먹을 것 좀 넣었어. 기숙사 식당에서 주는 밥 꼭꼭 잘 챙겨 먹고, 책 보고 공부하고 할 때 초코파이 같은 거 하나씩 먹으면서 해." 택배를 받는 주기는 일정하지는 않았다. 한 달 건너 받을 때도 있었고, 두 달일 때도 있었다. 내용물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고 아직 개봉하지 않은 두유 팩들을 창가에 쌓아둔다든가 하는 보관 노하우도 나름 생겼다.


대학교 졸업식 날, 엄마의 뒷모습, 그리고 몇 걸음 앞서 걸어가는 나



몇 해 동안의 기숙사 생활 후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자 택배 박스에는 본격적으로 반찬류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서울살이 이전에 집에서 늘 먹던 반찬들. 두부조림, 깻잎, 김치, 무말랭이, 깍두기, 메추리알 장조림, 머위나물, 구운 김. 내게 반찬을 보내신 뜻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처음에는 '반찬 택배'가 성가셨다. 대체로 비닐 팩 같은 것에 꽁꽁 묶여 있다 보니 나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가며 손톱에 힘을 주어 그 매듭을 풀어야 했고, 반찬 밀폐용기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옮겨 담아야 했던 것은 물론 어떤 건 냉장 보관을 해도 보관 기한이 길지 않아서 '빨리' 먹어야 했다. 여름철에는 종종 택배 박스에서 김칫국물 같은 반찬 냄새가 나기도 했다. 택배 정리를 하면서 나는 에어컨을 켜고도 창문을 열어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실거주자인 나보다 엄마는 내 방 냉장고에 무엇 무엇이 들어 있는지 더 잘 아는 분이셨다. "두부는 다 먹었지?" "김치는 많이 있어?" "김 좀 더 보내줄까?" 심지어 쌀도 보내주셨다. 반찬이야 아주 무게가 많이 나가는 건 아닐 테니 그렇다 쳐도, 몇 킬로그램짜리 쌀은 그냥 서울에서 구입하는 게 요즘 같은 시대에 배송도 편하고 더 좋은데. 부모와 떨어져 사는 자식의 하루 일과를 부모가 샅샅이 알고 계실 리는 없다. 엄마에게는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밥 먹고 등교해, 정해진 수업 시간표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착실한 자취 생활자였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PC방에서 밤을 지새웠던 날들, 대학가 주점이나 노래방을 다니며 지하철 막차 시간은 안중에도 없었던 그날들의 나를 엄마는 아마 지금도 다 알지는 못하실 거다.


그래서 분명 엄마의 계산으로는 '이쯤 되면 쌀이 슬슬 떨어져 가겠구나' 생각하실 때에도 원룸 안 쌀통에는 쌀이 거의 줄지 않아 있었다. "쌀 아직 있나?"라는 엄마의 물음에 나는 항상 "네 아직 많아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찬은 김치 같은 게 아니면 오래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방 냉장고는 점점 '아직 버리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 저장소가 될 때가 많았다. 냉장실 아래 칸에는 이를테면 '작년에 받은 김치'와 '올해 봄에 받은 김치'와 '지난주에 받은 김치'가 공존하기도 했다. 집 반찬에 나는 오래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엄마가 보내주는 반찬은 내 입맛에 꼭 맞았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택배를 받아 박스 안 내용물을 정리하고 냉장고 안의 오래된 잔반을 버리는 일은 많은 경우 귀찮게 여겨지기도 했으므로, 나는 가끔 밖에 있는 데도 엄마의 전화에 "택배 잘 받아서 냉장고에 정리해놓았어요"라고 응답하곤 했다.


보낸 사람: 엄마


인터넷 서점이나 쇼핑몰에서 주문한 게 아닌 이상 내게 택배를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엄마뿐이었으므로, '택배 루틴'에 익숙해진 뒤부터 나는 택배 상자 위에 적힌 수신인과 수취인 같은 정보를 살피지 않았다. 어차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낸 주소는 (살던) 집 주소, 받는 주소는 (사는) 집 주소. 받는 이름은 나. 그러다 우연하게도. 평소보다 박스가 조금 더 무거웠던가. 박스 위에 적힌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 보낸 사람 '엄마'. 그 두 글자에는 자신의 존재보다 자식의 앞날만 보고 걸어오신 당신의 삶이 그려졌다. 문자를 했던가 아님 전화를 했던가, 왜 보낸 사람에다가 예쁜 본인 이름을 두고 '엄마'를 적었냐고 웃으며 얘기했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다음부터 택배 박스에는 다시 '김선덕'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



"깍두기 이제 다 먹어가지?" "장조림 오래됐을 거니까 아직도 남았으면 그냥 버려." 여전히 내 냉장고 사정을 샅샅이 꿰고 계신 엄마의 택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박스 위에 적힌 가장 익숙하지만 동시에 가장 생경한 두 글자를 본 그날.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다가오는 생신 때 손편지를 쓰면서 봉투 겉면 보내는 사람에 내 이름 대신 '아들'이라 적어볼까? 하는 생각. 그러면 편지를 받으신 엄마는 큰 아들이 보냈을까, 작은 아들이 보냈을까 궁금해하시며 봉투를 열거나. 아니면 내게 전화를 걸어서는 "이 편지를 보낸 아들은 어느 아들인고" 하면서 웃으실 거다. 헷갈리지 않게 '얼굴 긴 아들'이라 적어볼까? 하며 혼자 상상만 하다가 이내 서울살이의 당면한 과제들에 지쳐 잊었던 게 생각난다.


엄마: "박스가 작아서 뭐 얼마 들어가지도 않더라."


최근에는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의 박스를 동시에 받은 적 있다. 하나는 일반 종이 박스였고 하나는 안에 아이스팩이 든 스티로폼 박스였다. 끝부분을 가위로 잘라서 마시는 홍삼액과 사과즙이 들어 있었다. 물론 예의 몇 종류 반찬과 함께 각종 과자류와 초코바, 떠먹는 요구르트 등이 포함돼 있었다. 4층에 사는 나는 물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되지만 부모님이 계신 집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이 박스를 들고 5층 계단을 내려오셨다는 건가. 택배 사무소까지는 차를 운전해 가셨을까. 이제는 '집밥'보다는 '사 먹는 밥'이 많고 집에서 간단히 먹을 쌀이나 반찬류는 내가 직접 근처 마트나 인터넷에서 돈 주고 사 먹어도 되건만, 택배를 보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자식이 나이가 들면서 부모가 느낄 감정의 하나는 점점 당신의 손에서 '멀어진다'는 종류의 것일 텐데, 그나마 매주도 아니고 두어 달에 한 번씩에 불과한 택배를 안 받아도 괜찮다는 건, 마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으셔도 분명 섭섭해하실 거라는 건 안다.


자취생활자의 한식이란 곧 '집밥'이며, 집밥은 곧 '엄마가 해주신 밥'에 포개어진다.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가족을 '식구'라고 표현하는 건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고 그 식사를 아주 오래 함께한 이들이기 때문일 거다. 요즘에야 사회적 풍조가 아주 조금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내 유년의 '집밥'은 결국 온전히 엄마의 노동이었다. 얼마 전 소설가 김애란의 강연을 들었다. 소설을 쓰게 된 이야기를 하며 김애란 작가는 "부모의 노동에 빚진 교양과 부모의 청춘에 빚진 학력"이라는 표현을 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10년이 넘게 받아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택배 박스의 무게와 내용물만큼이나 내 성년의 삶은 빚의 연속이었겠다. 그리고 이 빚은 계속 늘기만 할 뿐 영영 갚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아들의 일상이 궁금해 문득 전화를 거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다. 그런 생각을 오래 하지는 않고 분명 '먹고사니즘'에 치여 또 잊을 것이다. 그러니 내일은 한 번 더 생각할 것이다. 집밥에 빚진 지금의 내 삶이 앞으로는 과연 그 채무를 조금이나마 줄여나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나와 형. (왼쪽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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