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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3. 2019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타인에 귀 기울이려 노력하기

영화 <벌새>를 생각하면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평하지는 않는다. 다만 더 예민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일들을 나는 통과하지 않았으므로, 영화 <벌새>를 보면서도 '은희'의 이야기 전체에 온전히 공명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긴 어렵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대치동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독을 '0.1% 금수저'라 이야기하는 어떤 왓챠 코멘트, 영화의 이야기를 '자의식 과잉'이라 폄하하여 영화의 공간과 설정을 '작위적'이라 치부하는 그 코멘트에 대해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꼭 '은희'가 겪은 모든 것을 직접 그대로 겪어본 사람이 아니어도 나는 1994년의 저 모습이 지극히 현실적이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대치동이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 감상에 완전한 정답과 오답은 없을지라도 '더 잘 보는 것'의 정도 차이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한 가지 더 있다.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건 '능력'이라고. 그래서 오늘도 글을 쓰고, 글을 쓰기에 앞서 좀 더 생각하려고 '공부' 혹은 '노력'한다. (2019.09.02.)


영화 <벌새> 포스터



내 세상의 일부라고 믿었거나 전부라고 느꼈던 존재들이 일순간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가거나, 잘리거나, 무너지는 과정들을 차례로 겪으며, 끊임없이 불화하는 세계와 부딪히며, 우리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쉽게 주저앉지 않고 섣불리 연민하지 않으며, 공명하고 공감할 줄 알게 되며, 울고 난 얼굴로 눈을 뜨며 밥을 먹고 어제 만나지 못한 세계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가방 메고 주먹 쥐고, 여전히 궁금증을 안고. 영화 <벌새>에는 들을 수 없었던 대답들, 하지 못했던 질문들, 알고도 눈 감아야 했던 일들, 만져지는 상흔들이 있다. 이건 꼭 '은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 9/10점.)



(...) '은희'가 느끼는 외로움 내지는 소외감의 중요한 원천은 영화의 배경이 강남구 대치동이라는 점에서 온다. 좋은 '학군'을 찾아 모인 사람들 속에서 '부모 망신시키지 않는' 일이 중요한 가치처럼 주입되고 '서울대에 가는 일'이 마땅히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단계처럼 당연시되는 세계에서 '은희'에게는 같은 한문 학원에 다니는 '지숙'(박서윤)을 제외하면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교우'들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초반,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린 '은희'의 뒤로 같은 반 누군가의 "저렇게 잠만 자고 공부 안 하면 우리 집 파출부나 하게 될 걸"이라는 말이 들린다.) 요컨대 <벌새>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경제적 형편이 아니라 사춘기 속 호의적이지 않은 주변 환경과 관계들, 특정한 지역 사회에서의 타인들과의 비교, 그리고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세계 자체다. (...)


('지금의 나, 그때 나를 뺀 세상의 전부'라는 제목으로 발행한 이메일 연재 [1인분 영화] 9월호의 첫 글의 일부분이다.)


영화 <벌새> 스틸컷



*프립 소셜 클럽 '영화가 깊어지는 시간': (링크)

*관객의 취향 '써서 보는 영화' 9월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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